기우지사[沂雩之思] 기수(沂水)는 중국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 동남쪽 이산(尼山)에서 발원(發源)한 강물 이름이다. 공자가 몇몇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曾點)이 “따스한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대여섯 명과 동자(童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舞雩臺)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말했다는 데서 인용한 것이다. 곧 혼란한 세상에 나가지 않고 한적한 자연 속에서 자신의 덕을 닦고 도를 즐기는 데 뜻이 있는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기우지흥[沂雩之興] 기우(沂雩)의 흥취. 논어(論語) 선진(先進)의 “늦봄에 춘복이 만들어지고 나면, 관을 쓴 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바람 쐬며 시를 읊다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 출처를 둔 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에 유람하는 정취를 뜻한다.
기우진인[騎牛眞人] 소를 탄 진인. 후한(後漢) 때 방사(方士) 봉군달(封君達)을 가리킨다.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맨 처음 50여 년 동안 황련(黃蓮)을 먹다가 조거산(鳥擧山)에 들어가 1백여 년 동안이나 수은(水銀)을 먹고는 고향엘 돌아오니 마치 20세 젊은이 같았고, 또 항상 푸른 소를 타고 다녔으므로 청우도사(靑牛道士)라 불렸다.”라고 하였다.
기우첩[騎牛帖] 소 타는 형상을 그린 화첩(畫帖)이다. 남조 송(南朝宋) 때의 은사인 유응지(劉凝之)가 일찍이 기우가(騎牛歌)를 지어 부르기를 “내가 소를 탄다고 그대는 비웃지 마소. 세간의 만물은 내 좋은 대로 따른다네[我騎牛君莫笑 世間萬物從吾好]”라고 하였는데, 송(宋) 나라 때의 서화가인 이공린(李公麟)이 이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宋書 卷九十三>
기우침린[羇羽沈鱗] 기우(羇羽)는 장자(莊子)의 붕(鵬)이고, 침린(沈鱗)은 곤(鯤. 큰 고기)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명(北冥.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수천 리에 이른다. 그 곤(鯤)이 변신하면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수천 리에 이르는 몸뚱이에 날개를 펴서 날면,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인 것처럼 된다. 바람이 불고 바다에 큰 파도가 치는 계절에 붕(鵬)은 남명(南冥)을 향하여 날아간다. 남명(南冥)은 하늘의 연못이다”라고 하였다.
기우태상[紀于太常] 서경(書經) 군아(君牙)에 “네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가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 하여 왕가에 수고하여 그 이룬 업적이 태상(太常)에 기록되어 있다.[惟乃祖乃父, 世篤忠貞, 服勞王家, 厥有成績, 紀于太常.]”라는 내용이 보인다. ‘태상’은 해와 달을 그린 왕의 깃발 이름으로, 주례(周禮) 하관(夏官) 사훈(司勳)에 따르면 공이 있는 사람은 왕이 태상에 이름을 써서 그 사람과 공적을 기린다.
기욱[淇澳] 기수(淇水)의 벼랑. 기(淇)는 위(衛)에 있는 물 이름이며, 욱(澳)은 벼랑을 말한다. 기수의 물가에는 대나무가 잘 자랐으므로 기원(淇園)의 대가 유명하였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澳)에 “저 기수 벼랑을 보니 푸른 대가 아름답도다.[瞻彼淇澳 綠竹猗猗]”라고 하였다.
기욱녹죽[淇奧綠竹] 기수(淇水)의 벼랑의 푸른 대나무.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저 기수 가 언덕을 보니, 푸른 대가 아름답고 무성하도다.[瞻彼淇奧, 綠竹猗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기욱시[淇澳詩] 3장 27구로 구성된 이 시는 시경(詩經) 위풍(衛風)에 들어 있으며, 위(衛)나라 사람들이 무공(武公)의 덕(德)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대가 처음 무성하게 돋아나는 모습에 그의 학문이 진취해 가는 모습을 비유하여 찬탄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는 도학(道學)과 자수(自修)로 풀이하였다.
기욱장[淇澳章]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편(淇澳篇)을 인용한 것인데, 위 나라 사람들이 위 무공(衛武公)의 덕을 찬미한 것으로 “저 기수(淇水)가를 보니 푸른 대가 무성하구나 문채난 군자여! 끊은 듯하고 연마한 듯하구나.”[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하였다. 주자는 “이 시를 인용하여 명덕(明德)을 밝힌 자의 지선(至善)에 그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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