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奇字] 고문(古文: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무전(繆篆), 충서(蟲書)와 함께 한자(漢字)의 육체(六體)의 하나로, 고문의 변체(變體)인데 양웅(揚雄)이 이를 즐겨 배웠다고 한다.
기자[奇字] 기자는 한(漢)나라 왕망(王莽) 때의 육체서(六體書)의 하나로, 대략 고문(古文)에 근거하여 거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만든 문자이다. 한서(漢書) 권87하 양웅전(揚雄傳)에 의하면, 한나라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고문(古文), 기자(奇字) 등을 많이 알았으므로, 양웅(揚雄)이 현정(玄亭)에 거할 적에 유흠(劉歆)의 아들 유분(劉棻) 등이 그에게 찾아가서 글자를 물어 배웠다고 한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양웅은 가난하게 살면서 술을 좋아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가끔 호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가서 기이한 글자를 물었다.”고 하였다. 기자는 한나라 때에 제정된 여섯 가지 서체[六書] 가운데 하나인데, 독특한 고문 서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기자[奇字] 기자(奇字)는 고문(古文)의 특이한 자형으로, 서체의 하나이기도 하다. 수서(隋書) 권32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 여섯 가지 체의 글로 학동들을 가르쳤으니, 여기에 고문, 기자, 전서, 예서, 무전, 충조가 있었다.[漢時以六體敎學童, 有古文奇字篆書隷書繆篆蟲鳥.]”라고 하였다. 양웅전(揚雄傳)에 “유분이 일찍이 양웅에게서 기자를 배웠다.[劉棻嘗從雄學作奇字]”라고 하였고, 또 “집이 본래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집에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다. 때때로 호사자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어울리며 배웠는데, 거록 사람 후파는 늘 양웅의 집에 기거하면서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배웠다.[家素貧耆酒, 人希至其門. 時有好事者, 載酒肴從游學, 而鉅鹿侯芭, 常從雄居, 受其太玄法言焉.]”라고 하였다. <漢書 卷87下>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은(殷: 商상)나라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산동(山東) 태곡(太谷) 동북쪽에 있었던 기(箕)나라에 봉해졌다. 기(箕)나라에 봉(封)해지고 작위가 자(子)이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칭하였다. 은 주왕(殷紂王)이 무도(無道)하고 포악한 것을 보고 간했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고 거짓으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노예가 되었다가 주(紂)에 의해 구금되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주(紂)를 죽인 뒤에 기자(箕子)를 석방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법에 관해 물으니,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상서(尙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이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책봉하여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다 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미자(微子)는 떠나가고, 기자(箕子)는 노비가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죽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은(殷)에는 세 어짊이 있었다’고 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기술되어 있다.
기자[箕子] 기자는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공자가 미자(微子)・비간(比干)과 함께 ‘삼인(三仁)’으로 칭한 바 있다. 주왕이 음탕한 짓을 자행하자, 기자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떠날 만하다.”라고 말하니, 기자는 “신하가 되어서 자신의 간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여 떠나는 것은 바로 군주의 악을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들에게 환심을 얻는 것이니, 나는 차마 이렇게 할 수 없다.”라고 하고,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미친 체하면서 노비가 되고는, 마침내 은둔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며 스스로 슬퍼하였다 한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기자[箕子] 은(殷)나라 말기의 삼인(三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상(商: 殷은)나라 말(末)의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로, 이름은 서여(胥餘)이고, 태사(太師)였으며 자작(子爵)으로 기(箕) 땅에 봉해져 기자라 하였다. 기자(箕子)의 ‘기(箕)’는 봉해진 나라의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爵位)이다. 주(紂)가 무도(無道)하여 충간(忠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뒤에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포악한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기자를 석방시켜주고 천도(天道)를 묻자 홍범(洪範)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주무왕(周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기자는 동이(東夷)인 조선에 와서 여덟 가지의 교화를 펴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다 한다. 그 나라를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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