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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이[箕子明夷]~기자묘[箕子廟]~기자무례[杞子無禮]


기자릉[箕子陵]  기자(箕子)의 무덤이다. 기자는 중국 은(殷)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일설에는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숙부라고 한다.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을 하여 남의 종이 되었으나, 주왕(紂王)에게 사로잡혀 유폐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기자를 풀어 주었으나,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여 유민(遺民)을 이끌고 이주하였다. 이때 기자가 한반도(韓半島)로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중국과 우리의 여러 사서(史書)에 기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근거하여 기자의 제사를 지내고 그 사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기자릉은 평양(平壤) 기림리(箕林里)에 있다. 조선 시대 숙종이 분형(墳形)을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성종・고종 때 중축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봉묘(封墓)된 이 무덤이 기자의 무덤인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

기자명이[箕子明夷]  기자(箕子)가 은(殷)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밝음을 감추어 화를 면하였고, 마침내 동방으로 와서 도를 전한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의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에 “육오는 기자가 밝음을 감춤이니, 곧게 지킴이 이롭다.[六五 箕子之明夷 利貞]”라고 하였다.

기자묘[箕子廟]  은(殷)나라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으로, 평양부(平壤府)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다. 고려 숙종(肅宗) 7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의 건의(建議)에 따라 기자묘(箕子墓) 앞에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사 지냈는데,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인습하였다. 광해군(光海君) 4년에 숭인전(崇仁殿)이라 개칭(改稱)하였다.

기자묘[箕子廟]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이다. 기자는 성은 자(子), 명은 수유(須臾)・서여(胥餘)이다. 기(箕)는 국명(國名)이고, 자(子)는 작위(爵位)이다. 상나라 29번째 임금 제을(帝乙) 17년(기원전 1175) 병술년에 태어나,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기원전 1122)에 조선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 주 성왕(周成王) 33년(기원전 1083) 무오년에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위기간은 40년이다. 참고로 지봉유설(芝峯類說) 권19 궁실부(宮室部) 사묘(祠廟)에 “기자의 능묘는 평양부 성 북쪽에 있는데, 수호(守戶)를 두어 나무꾼과 목동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기자전(箕子殿)’이라 부른다. 여기에 참봉을 두어 봄가을로 향과 폐백을 내려서 관찰사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하고 있다. 근세에 이르러 비로소 숭인전(崇仁殿)을 세워 후손인 선우씨(鮮于氏)를 전감(殿監)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숭의전(崇義殿)과 똑같이 하도록 하였으며, 또 비석을 세워 이를 기록하게 하였다.[箕子墓在平壤府城北, 置守戶以禁樵牧. 立廟祀享, 號箕子殿. 置參奉, 春秋降香幣, 令觀察使致祭. 至近歲, 始置崇仁殿, 以鮮于姓爲殿監, 主其祭祀, 一依崇義殿. 且立碑以紀之.]”라고 하였다.

기자무례[杞子無禮]  기(杞)는 춘추시대의 제후나라 이름이요, 자(子)는 제후로서의 최하인 자작(子爵)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의 임금인 기자가 약소국인데도 불구하고 강대국인 제(齊) 나라에 무례하게 굴다가 나라가 망하였다. 춘추(春秋) 희공(僖公) 27년 경문(經文)에 “봄에 기자가 찾아왔다.[春杞子來朝]”라고 하고 “을사에 공자 수가 군대를 이끌고 기나라를 쳐들어갔다.[乙巳 公子遂帥師入杞]”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좌씨(左氏)는 “가을에 기나라로 쳐들어간 것은 기자의 무례함을 응징한 것이었다.[秋 入杞 責無禮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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