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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방욕[棊子方褥]~기자불립[企者不立]~기자역심[棊子役心]


기자문양웅[奇字問揚雄]  기자(奇字)는 문자(文字)의 육체(六體) 가운데 하나로서 고문(古文) 비슷한 글자인데, 한(漢)나라 때 유분(劉棻)이 일찍이 양웅(揚雄)을 찾아가 기자를 배웠던 데서 온 말이다. 양웅전(揚雄傳)에 “유분이 일찍이 양웅에게서 기자를 배웠다.[劉棻嘗從雄學作奇字]”라고 하였고, 또 “집이 본래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집에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다. 때때로 호사자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어울리며 배웠는데, 거록 사람 후파는 늘 양웅의 집에 기거하면서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배웠다.[家素貧耆酒, 人希至其門. 時有好事者, 載酒肴從游學, 而鉅鹿侯芭, 常從雄居, 受其太玄法言焉.]”라고 하였다. <漢書 卷87下>

기자방욕[棊子方褥]  바둑판무늬를 짜 넣은 비단[綺]으로 만든 방형의 방석이다. 석명(釋名) 석채백(釋采帛)에 “綺(기)란 바둑판무늬[棊文]가 있는 것으로, 사방무늬가 바둑판과 같다.”라고 하였다.

기자불립[企者不立]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24장에 “까지발로 서는 자는 오래 서있지 못하고, 겅중겅중 걷는 자는 멀리 걸어가지 못한다.[企者不立, 跨者不行.]”라고 하였다. 하상공본(河上公本)은 ‘跂者(기자)’로 되어 있고, 백서본(帛書本)은 ‘吹者(취자)’로 되어 있다. 백서본(帛書本)의 경우 ‘吹(취)’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고대 도인술(導引術)의 한 가지 동작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吹噓(취허: 과장하다)’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다.

기자불신[箕子不臣]  주(周) 무왕(武王)은 은(殷) 주(紂)의 숙부요, 태랑(太郞)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여, 신하로 삼지 않는 우우(優遇)를 했다 한다.

기자사[箕子祠]  기자사는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이다.

기자산[棄子山]  고구려 때의 산 이름.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싸움에 지고 돌아오면 이 산에 버렸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기자수서[箕子受瑞]  서옥(瑞玉)을 받았다는 것은 천자의 명으로 나라에 봉해지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의 명에 의해 우리나라에 봉해졌음을 가리킨다.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가 주 무왕을 위해서 치국안민의 도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해 주었으며, 그 뒤에 조선(朝鮮)에 봉해져 동방에 와서는 팔조교(八條敎) 등을 세워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기자양운식[奇字揚雲識]  양운(揚雲)은 곧 한대(漢代)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자운(子雲)은 그의 자이다. 양웅이 본디 고문(古文), 기자(奇字) 등을 많이 알았으므로, 유분(劉棻) 등이 항상 그에게 가서 기자를 물어 배웠다. 양웅은 또 원래 가난한 데다 술을 좋아했으므로, 가끔 호사자(好事者)들이 술과 안주를 싣고 그를 찾아가 수업(受業)을 청하기도 했다. <漢書 卷87下 揚雄傳>

기자역심[棊子役心]  정위(丁謂)가 바둑을 몹시 좋아하였는데, 이전(李畋)에게 마음을 비우는 방법[虛心之法]에 대해 질문하자, 이전은 “임금을 보필하는 이외에 바둑에 마음을 쏟지 않으시면 마음이 벌써 반은 빌 것입니다.[願弼諧之外. 勿於棊子役心. 虛己半矣.]”라고 대답하였다. 정위(丁謂)는 북송(北宋)의 관료로 자는 공언(公言), 호는 손정(孫丁)이다. 기민하고 교활한 성품을 지녔고, 글씨・그림・음률・노름 등 모든 방면에 통달했다. 이전(李畋)은 송나라의 현신 장영(張詠)의 문인(門人)으로 자는 위경(渭卿), 호는 곡자(谷子)이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42 伎藝部 棊子役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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