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사[洛陽社] 낙사(洛社)를 말한다. 북송(北宋)의 문언박(文彦博)이 사마광(司馬光)・부필(富弼) 등 13인과 함께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만든 모임인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낙양상군[洛陽相君] 임금의 욕심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탄식한 소식의 시 여지탄(荔支嘆) 마지막 부분에 “낙양의 재상은 충효로 유명한 집안의 출신인데, 그도 요황의 꽃을 바치다니 가련하도다.[洛陽相君忠孝家 可憐亦進姚黃花]”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39> 낙양의 상군(相君)은 소식(蘇軾)이 표충관비(表忠觀碑)에서 일컬은 충효의 가문 출신인 재상 전유연(錢惟演)을 가리킨다. 그는 서경(西京) 낙양(洛陽)의 유후(留後)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 오월왕(吳越王) 전숙서(錢俶叙)는 송조(宋朝)에 투항했다. 송태종(宋太宗)이 그를 일러 ‘충효로서 사직을 보호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소식이 그를 충효가(忠孝家)라고 불러준 것이다. 전유연은 당현종(唐玄宗)이 먼 남쪽 지방의 여지를 파발로 전송하여 양귀비(楊貴妃)에게 여지를 먹인 옛일을 본떠 요황(姚黃)이라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품종의 모란(牡丹)을 조정으로 보내 감상하게 했다. 사람들이 그를 낙양사상(洛陽使相)이라고 불렀다. 요황(姚黃)은 모란꽃의 한 종류로 노란꽃이 피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낙양(洛陽)의 요씨(姚氏) 집안에서 나오며 일 년에 겨우 몇 송이만이 필뿐이라고 한다.
낙양성시[洛陽城市] 중국의 낙양과 장안(長安)은 오랫동안 수도(首都)가 되었으므로 이르는 말이다.
낙양소공[洛陽邵公] 낙양(洛陽)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던 지방이며, 소공(邵公)은 정호의 둘째 아들 정단각(程端慤)의 어릴 때 이름이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6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다. <二程文集 卷4 程邵公墓誌>
낙양소년[洛陽少年] 한(漢)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가 낙양 출신으로, 연소한 나이에 수재(秀才)로 칭해지며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는 등 문제(文帝)의 총애를 한 몸에 받자, 주발(周勃)과 관영(灌嬰) 등이 미워하며 “낙양에서 온 나이 어린 초학이 오로지 대권을 독점하려 하며 정사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洛陽之人 年少初學 專欲擅權 紛亂諸事]”라고 비방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낙양소년[洛陽少年] 낙양소년은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 가의(賈誼)를 말한다. 가의는 서한(西漢)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20세에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올랐다. 가의는 당대의 정치에 대하여 치안책(治安策)을 지어 올렸던 정치가이다. 재상들이 가의(賈誼)를 미워하여 낙양 소년이라 하였다. 가의는 한때 문제의 총애를 입었으나 참소를 받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삼상(三湘)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상향(湘鄕), 상담(湘潭), 상음(湘陰)으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투신한 곳인데, 가의가 이곳을 지나며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굴원을 애도하는 한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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