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여아행[洛陽女兒行] 악부(樂府) 가운데 신악부(新樂府)에 속한다.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하중지수가(河中之水歌)에 “하중의 물 동쪽으로 흐르니, 낙양의 여자아이 이름은 막수라. 막수는 나이 열셋에 비단 짤 줄 알았고, 열넷에 남쪽 길머리에서 뽕을 땄다네. 열다섯에 노씨(盧氏) 집으로 시집가고, 열여섯에 아이 낳으니 자(字)가 아후(阿侯)라.[河中之水向東流 洛陽女兒名莫愁 莫愁十三能織綺 十四采桑南陌頭 十五嫁爲盧家婦 十六生兒字阿侯]”고 했다. 행(行)은 시가(詩歌) 형식의 한 종류이다.
낙양오후[洛陽五侯]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동시에 후(侯)로 봉해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문란시킨 다섯 사람의 환관(宦官)을 말하는데, 신풍후(新豐侯) 선초(單超), 무원후(武原侯) 서황(徐璜), 상채후(上蔡侯) 좌관(左悺), 동무양후(東武陽侯) 패원(貝瑗), 여양후(汝陽侯) 당형(唐衡)이다. <後漢書 卷78 宦者列傳 單超>
낙양원생호[洛陽袁生戶] 낙양(洛陽) 원생(袁生)의 집. 원생(袁生)은 후한(後漢) 때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을 가리킨다. 원안이 벼슬길에 나가기 전에, 일찍이 낙양(洛陽)에 대설(大雪)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몸소 나가 민가(民家)를 순행할 적에, 다른 집들은 다 눈을 치웠는데, 원안의 집 문밖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으므로, 그 집에는 사람이 이미 굶어 죽은 줄 알고 사람을 시켜 눈을 치우고 문을 열어 살펴보게 한 결과, 원안이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낙양자[洛陽子] 서한(西漢) 때 가의(賈誼)를 가리키는데, 낙양재자(洛陽才子)라고도 한다.
낙양재자[洛陽才子] 원래 가의(賈誼)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가 낙양 사람이고 소년시절부터 재능을 나타내 보인 까닭이었다. 나중에는 낙양 출신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낙양지가[洛陽紙價] 낙양의 종이 값이라는 뜻으로, 훌륭한 글을 다투어 베끼느라고 종이의 수요(需要)가 늘어서 종이 값이 등귀(騰貴)한 것을 말함이니 문장(文章)의 장려(奬勵)함을 칭송(稱頌)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문장가인 좌사(左思)가 10년을 구상하여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중시되지 못했다가, 황보밀(皇甫謐)이 삼도부의 서(序)를 짓고, 장재(張載), 유규(劉逵)가 주(注)를 내고, 장화(張華)가 이 글을 보고 감탄하여 “반고, 장형의 등류이다.[班張之流也]”라고 찬사를 보낸 이후로, 당시 부호(富豪)들의 집에서 서로 다투어 이 글을 베낌으로 인하여 낙양의 종이 값이 폭등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훌륭한 글을 다투어 베끼느라 종이의 수요가 늘어 값이 오르다.’라는 고사에서 유래, 문장이 훌륭함을 칭찬하는 말이다. 책의 평이 좋아 매우 잘 팔림을 이른다. 서진(西晋)의 문학자 좌사(左思)가 제도부(齊都賦)와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을 때 낙양(洛陽) 사람들이 너도나도 베꼈기 때문에 낙양의 종이가 모자라 비싸진 고사가 있다. 저서가 많이 팔리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낙양지귀(洛陽紙貴). 낙양지가고(洛陽紙價高).
낙양지귀[洛陽紙貴] 낙양의 종이가 귀해졌다는 뜻으로, 문장(文章)이나 저서(著書)가 호평(好評)을 받아 잘 팔림, 쓴 글의 평판(評判)이 널리 알려짐, 혹은 저서(著書)가 많이 팔리는 것을 말할 때 쓰인다. 진(晉) 나라 때 좌사(左思)가 10년간의 구상을 거쳐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했는데, 황보밀(皇甫謐), 장재(張載), 유규(劉逵) 등의 학자들에 의해 이 글이 명문으로 알려지자, 당시 사람들이 그 글을 서로 다투어 베끼는 바람에 낙양(洛陽)에 종이가 귀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문장이 온 세상에 회자되는 것을 뜻한다.
낙양진솔[洛陽眞率] 사마광(司馬光)이 65세에 낙양(洛陽)에서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벗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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