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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상영[蘭亭觴詠]~난정서[蘭亭序]~난정수계[蘭亭修稧]


난정상영[蘭亭觴詠]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늦봄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에서 왕희지(王羲之)・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들이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 이어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놀이를 하였다. 이때 왕희지가 직접 난정기(蘭亭記)를 짓고 썼던바, 그 대략에 “비록 관현악의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읊는 것이 또한 그윽한 정을 펴기에 충분하다.[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라고 하였다.

난정서[蘭亭序]  난정서는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연간 3월 상사일(上巳日)에 명필(名筆) 왕희지(王羲之)가 당대의 명사(名士)들인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과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계사(禊事)를 치르면서 직접 쓴 난정집서첩(蘭亭集序帖)을 말하는데, 그 서법(書法)이 매우 뛰어나서 수당(隋唐) 시대 제가(諸家)의 본보기가 되었던바, 당송(唐宋) 시대에 와서는 진본(眞本)은 이미 없어졌고 임모본(臨摹本)만이 매우 많아졌으니, 당 태종(唐太宗) 때에 구양순(歐陽詢)이 임모한 것을 정무본(定武本)이라 하고, 저수량(褚遂良)이 임모한 것을 신룡본(神龍本)이라 하는바, 이 두 본이 가장 진본에 근접한다고 한다.

난정소장함[蘭亭少長咸]  난정(蘭亭)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회계산(會稽山) 양란저(陽蘭渚)에 있는 왕희지(王羲之)의 정자이다.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왕희지가 사안(謝安)과 지둔(支遁) 등 당대의 명사 42인을 여기에 초청하여 수계(修禊)를 하고 시회를 가졌다. 이때 지은 시들을 모아 시첩을 만들고, 왕희지가 이 시첩에 서문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난정서에 “모든 현사들이 빠짐없이 오고, 노소의 명사들이 모두 모였네.[群賢畢至 少長咸集]”라고 한 부분이 있다.

난정수계[蘭亭修禊]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2인이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음력 3월 상순(上旬)의 사일(巳日)을 상사(上巳)라고 하였는데, 위진(魏晉) 시대 이후로는 사일에 관계없이 3월 3일을 상사라고 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 “모춘(暮春)의 초엽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 계사(禊事)를 치렀다.”라고 하였다.

난정수계[蘭亭修稧]  난정(蘭亭)은 진(晉)나라 때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삼월 삼짇날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놀았던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정자이다. 당시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들은 수계(修禊)하며 물 구비에 잔을 띄워 술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고, 난정기(蘭亭記)라는 명문(名文)을 남겼다. 왕희지는 이글에서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수계는 3월 상사일(上巳日)에 냇가에 가서 몸을 씻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그 해의 액운을 면한다 한다.

난정순장[蘭亭殉葬]  난정첩(蘭亭帖)을 순장(殉葬)한다는 뜻으로, 당나라 태종이 왕휘지가 쓴 난정집서를 몹시 아껴 죽어서 그것을 함께 묻게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서화(書畵)나 도자기(陶瓷器) 등(等)의 물건(物件)을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움을 이른다.

난정승집[蘭亭勝集]  난정(蘭亭)의 큰 모임이란 동진 목제(東晉穆帝) 때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한 시인 묵객들이 회계산(會稽山) 산음(山陰)의 난정에 모여 수계한 뒤에 시를 읊고 즐겼던 일을 말한다. <蘭亭集序>

난정승집[蘭亭勝集]  난정의 성대한 모임. 진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에 모여, 재액을 떨어버리고 복을 구하는 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晉書 王羲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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