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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옥갑[蘭亭玉匣]~난정첩[蘭亭帖]~난정회[蘭亭會]


난정옥갑[蘭亭玉匣]  난정 옥갑이란,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진대(晉代)의 명필(名筆) 왕희지(王羲之)로부터 그 이하 명필들의 글씨 1000여 축(軸)을 구입했던바, 그중에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유독 소중히 여겨 옥갑(玉匣)에 담아서 그의 후비(后妃)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소릉(昭陵)에 순장했던 데서 온 말이다. 오대(五代) 당(唐)의 온도(溫韜)가 소릉을 도굴하여 그 옥갑에 담긴 글씨들을 다 훔쳐 갈 적에 광중(壙中)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다만 광중에서 곡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전해 온 말일 뿐, 그 근거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舊五代史 卷73 唐書 溫韜列傳> <蘭亭考 卷3>

난정유수적벽월[蘭亭流水赤壁月]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멋들어진 풍류를 함께 즐겼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송(宋) 나라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으로 회자되고 있다.

난정정무본[蘭亭定武本]  왕희지의 친필 난정서(蘭亭序)를 이름인데, 정무본(定武本)은 성세창(成世昌) 난정고(蘭亭考)에 의하면 “당 태종이 난정의 진적(眞跡)을 얻어 임첩(臨帖)하여 학사원(學士院)에 각하게 하였다. 오대(五代) 양(梁)의 시대에 변도(汴都)에 옮겨 두었는데 요(遼) 야율덕광(耶律德光)이 후진(後晉)을 깨뜨리고 그 석각을 가지고 북으로 가다가 도중에 병이 들어 죽고 그 돌은 살호림(殺虎林)에 버려졌다. 송(宋) 경력(慶曆) 연간에 발견되어 정주(定州)의 주치(州治)에 두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구본(歐本 : 구양수(歐陽脩) 모본(摸本))이라 칭한다.

난정지[蘭亭紙]  진(晉)나라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짓고 쓴 난정서(蘭亭序)를 말한다.

난정첩[蘭亭帖]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名士)가 산음(山陰)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를 하고 시를 지은 것에 대해, 왕희지가 서문을 짓고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鬚筆)로 쓴 것을 말한다. 진본(眞本)은 당 태종의 무덤에 함께 들어갔고, 신룡본(神龍本), 정무본(定武本) 등 모본(摹本)이 뒤에 전해졌다고 한다.

난정첩[蘭亭帖]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의 난정(蘭亭)에서 잔치를 베풀고 명사(名士) 사안(謝安)・손작(孫綽) 등 42명을 초빙한 다음, 그들이 지은 시를 수합하고 그 서문 격인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짓고 행서(行書)로 글씨를 써서 만든 법첩이다. 잠견지(蠶絹紙)에 서수필(鼠鬚筆)로 썼는데, 고금의 명필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난정취[蘭亭醉]  진(晉) 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당시의 명사들이 난정에 모여서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계연(禊宴)을 베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던 것을 뜻한다.

난정회[蘭亭會]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왕희지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이란 곳에서 문인들과 회합을 가진 것이 실려 있는데, 왕희지는 난정집서(蘭亭集序)에서 그날 가진 모임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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