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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북군[南軍北軍]~남굴[南窟]~남궁[南宮]


남군북군[南軍北軍]  한대(漢代) 중앙군으로 도성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 북군(北軍)은 중위(中尉)가 지휘하며 삼보(三輔) 지역에 주둔하면서 도성을 수비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남군(南軍)의 병사를 위사(衛士)라고 하는데, 위위(衛尉)의 통솔하에 각 궁성의 수비를 맡았다. 또한 궁성 안의 각 전각(殿閣)의 수비는 낭중령(郎中令: 후대 광록훈光祿勳) 휘하의 위랑(衛郞)이 맡았다. 이들은 낭관(郎官)으로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로서 관리 후보생이었다.

남굴[南窟]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석회동굴로, 온달 장군이 성을 쌓았다는 온달성(溫達城) 밑에 있기 때문에 온달동굴이라고도 하고, 영춘남굴(永春南窟)・지산굴(地山窟)이라고도 한다.

남궁[南宮]  남궁(南宮)은 공신의 초상화를 그려 놓은 곳이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 개국 공신 32명의 초상화를 남궁의 운대(雲臺)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남궁[南宮]  남궁은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상서성이 열수(列宿)의 남궁에 속하므로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남궁[南宮]  조선 시대 예조(禮曹)의 별칭이다.

남궁[南宮]  예부(禮部)의 별칭이다. 예부의 원외랑이나 낭중을 서금과(瑞錦窠) 혹은 남궁 사인(南宮舍人)이라고 불렀다.

남궁[南宮]  남궁은 진(秦)・한(漢) 때의 궁전 이름이다. 유방이 제위(帝位)에 오른 뒤 진(秦)나라의 가혹한 의법(儀法)을 모두 없애고 임금과 신하 사이의 예절을 간이하게 만들었다. 이후로 신하들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서로 자기의 공로가 많다고 다투다가 취하면 함부로 소리쳐 부르고 검을 뽑아서 기둥을 치기까지 하니 유방이 더욱 싫어하였다. 이에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건의하며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史記 卷99 叔孫通列傳>

남궁[南宮]  남궁은 낙양에 있는 진(秦)나라 궁궐의 이름인데,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뒤 남궁의 복도 위에서 보니, 여러 장수들이 봉작(封爵)을 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남궁[南宮]  북송의 서예가인 미불(米芾)을 가리킨다. 미불이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예부(禮部)의 별칭인 남궁이라 불렀다. 미불의 자는 원장(元章), 호는 양양만사(襄陽漫士) 또는 해악외사(海岳外史)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어받았으며, 채양(蔡襄),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과 더불어 송 4대가로 불린다. 저술로 화사(畫史),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晉英光集), 해악명언(海岳名言) 등이 있다.

남궁[南宮]  제후의 학궁(學宮).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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