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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경숙[南宮敬叔]~남궁기신[南宮紀信]~남궁리성[南宮履聲]


남궁경숙[南宮敬叔]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이다. 성(姓)은 희(姬), 이름은 열(說), 시호는 경(敬)인데, 남궁(南宮)은 씨(氏)이다. 아버지 맹희자(孟僖子)의 명(命)으로 공자(孔子)의 제자가 되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7・11년><春秋左氏傳 哀公 3년><禮記 檀弓 上>

남궁경숙[南宮敬叔]  남궁경숙은 노(魯)나라 대부(大夫) 맹희자(孟僖子)의 아들 중손열(仲孫閱)인데, 복위(復位)를 위해서 보화(寶貨)를 싸들고 뇌물을 상납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孔子)는 벼슬을 잃으면 차라리 빨리 가난해져야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일이 있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남궁 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로 돌아올 적에 반드시 보물을 싣고 와서 조회하자, 부자(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뇌물을 쓰기 보다는 지위를 잃으면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나음만 못하다.’라고 하셨으니, ‘지위를 잃으면 빨리 가난해지고자 한다’는 것은 경숙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南宮敬叔反, 必載寶而朝. 夫子曰:‘若是其貨也, 喪不如速貧之愈也.’ 喪之欲速貧, 爲敬叔言之也.]”라고 하였다.

남궁괄[南宮适]  남궁괄은 노(鲁)나라 사람으로, 남용(南容)이라고도 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남궁괄이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奡)는 육지에서 배를 끌 정도로 힘이 세었으나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禹)와 직(稷)은 몸소 농사를 지었으나 천하를 소유했습니다.[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 而有天下.]”라고 말하며 공자의 의견을 물었는데, 공자가 대답하지 않다가 그가 나간 뒤에 그를 군자라고 칭찬하였다. 남궁괄은 여기에서 예(羿)와 오(奡)는 당시의 권세가를 비유하고, 우(禹)와 직(稷)은 공자에게 비유하여 은근히 공자(孔子)를 찬미한 것이다.

남궁기신[南宮紀信]  남궁은 한(漢) 나라 궁전 이름인데,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가 낙양(洛陽)의 남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있다. 기신(紀信)은 고조의 충신으로, 형양(滎陽) 싸움에서 고조로 위장하여 대신 잡혀서 그사이에 고조가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남궁도[南宮縚]  남궁도는 노(魯)나라의 공족(公族)으로 자는 자용(子容)인데, 공자(孔子)의 형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공자의 조카딸인 셈이다. 예기(禮記) 경문(經文)에 “남궁도(南宮縚)의 처가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부자(공자)께서 그에게 좌(髽)를 하라고 가르치시기를 ‘너는 좌(髽)를 종종(從從)하게 하지 말며 호호(扈扈)하게 하지 말라. 개암나무로 비녀를 만들되 길이는 1척으로 하고, 머리를 묶는 끈은 늘어뜨리는 부분의 길이를 8촌으로 하라.’[南宮縚之妻之姑之喪, 夫子誨之髽曰:‘爾毋從從爾, 爾毋扈扈爾. 蓋榛以爲笄, 長尺, 而總八寸.’]”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남궁리성[南宮履聲]  남궁의 신발 끄는 소리. 남궁(南宮)은 진(秦)・한(漢) 때의 궁전 이름이다. 한(漢) 나라의 정숭(鄭崇)이 상서복야(尙書僕射)로 발탁된 뒤 아무도 못 하는 말을 감히 직간(直諫)하곤 하였는데, 그는 임금을 뵈러 대궐을 들어갈 때마다 가죽신을 끌었다고 한다. 그가 가죽 신발을 끌고 오는 소리[曳革履]를 들으면 애제(哀帝)가 “정 상서(鄭尙書)가 또 오는구나.”라 하고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鄭崇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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