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箜篌謠공후요 / 공후요 / 李白이백


攀天莫登龍[반천막등룡]   하늘에 올라도 용은 올라타지 말고

走山莫騎虎[주산막기호]   산을 내달려도 호랑이는 타지 마라

貴賤結交心不移[귀천결교심불이]   귀천이 사귀어 변치 않음은

唯有嚴陵及光武[유유엄릉급광무]   엄자릉 광무제 뿐이었다네

周公稱大聖[주공칭대성]   주공은 큰 성인으로 칭송되지만

管蔡寧相容[관채녕상용]   관숙 채숙 어찌 용납하지 않았으며

漢謠一斗粟[한요일두속]   한나라 노래에 한 말 좁쌀도 문제는

不與淮南舂[불여회남용]   회남왕 아우와는 찧지 않았다 했나

兄弟尙路人[형제상로인]   형제도 오히려 남이 되는 세상에

吾心安所從[오심안소종]   내 마음 어디 두고 따라야 하나

他人方寸間[타인방촌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山海幾千重[산해기천중]   산과 바다가 몇 천 겹인가

輕言托朋友[경언탁붕우]   경솔히 친구에게 부탁했다가

對面九疑峯[대면구의봉]   구의봉 같은 미혹과 마주한다네

多花必早落[다화필조락]   꽃이 많으면 반드시 일찍 지나니

桃李不如松[도리불여송]   복사꽃 오얏꽃은 소나무만 못하네

管鮑久已死[관포구이사]   관중과 포숙은 세상 뜬지 오래이니

何人繼其蹤[하인계기종]   어느 누가 그 발자취 이어가리오

<箜篌謠공후요 / 공후요 / 李白이백>


  • 이백[李白]  당(唐)나라 때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취선옹(醉仙翁).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의 대표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당 현종(唐玄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에까지 올랐으나 현종의 실정 이후 정치에 뜻을 잃고 방랑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는 서정성(抒情性)이 뛰어나 논리성(論理性), 체계성(體系性)보다는 감각(感覺), 직관(直觀)에서 독보적(獨步的)이다. 술, 달을 소재(素材)로 많이 썼으며, 낭만적(浪漫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인 시풍을 지녔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시를 남겼으며, 그의 생활 태도를 반영한 대표작으로는 촉도난(蜀道難)이 있다.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30권이 전한다.
  • 반천[攀天]  하늘을 더위잡다. 하늘을 잡고 오르다.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과 친분 관계를 맺다.
  • 반룡[攀龍]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공명(功名)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나오는 “용의 비늘을 부여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즉위하기 전에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중산(中山)에 돌아오자, 모든 장수들이 황제에 등극하기를 청하였으나 유수가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에 경순(耿純)이 “천하의 용사(勇士)와 대부(大夫)들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대왕(大王)을 따르는 것은 그 목적이 진실로 용의 비늘을 붙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어서 그 뜻을 이루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대왕께서 시일을 지체하고 무리들의 마음을 거슬려 황제의 칭호와 지위를 바로잡지 않으시니, 저는 천하의 사대부들이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이 궁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두어 오랫동안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큰 무리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습니다.[天下士大夫捐親戚, 棄土壤, 從大王於矢石之閒者, 其計固望其攀龍鱗, 附鳳翼, 以成其所志耳. 今功業即定, 天人亦應, 而大王留時逆眾, 不正號位, 純恐士大夫望絕計窮, 則有去歸之思, 無為久自苦也. 大眾一散, 難可複合. 時不可留, 眾不可逆.]”라고 하며 설득하니, 이에 호남(鄗南)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쳤다. <史略 卷3 東漢><通鑑節要><後漢書>
  • 기호[騎虎]  호랑이 등에 탄다는 것은 기호난하(騎虎難下)에서 나온 말이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途中)에 내리면 호랑이에게 먹혀버리므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시작된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다는 뜻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형편을 이른다. 진서(晉書) 권67 온교열전(溫嶠列傳)에 “오늘날의 사세를 보건대 의리상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다. 이는 마치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어떻게 중도에서 내릴 수가 있겠는가.[今之事勢 義無旋踵 騎猛獸 安可中下哉]”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기호난하(騎虎難下)’라는 성어가 유래하였다. 기호난하는 본래 기수난하(騎獸難下)라고 했는데 당(唐)나라 때부터 전자로 바뀌게 되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 엄릉[嚴陵]  동한(東漢)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을 이른다. 그의 자(字)가 자릉(子陵)이어서 엄자릉(嚴子陵)이라 불렀다. 엄릉(嚴陵)은 엄자릉(嚴子陵)을 줄여 쓴 말이다. 회계(會稽) 여요인(余姚人)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 광무제가 엄광을 찾아내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세 번을 부른 뒤에야 겨우 나왔다. 광무제와 엄광이 함께 잠을 자던 중에 엄광이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이 어좌(御座)를 범하였습니다.”라 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옛 친구인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이다.”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후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서 농사짓고 낚시질하며 은거하였다. 후인들은 그가 낚시하던 곳을 엄릉뢰(嚴陵瀨)라고 불렀다. 동한(東漢)은 후한(後漢)의 별칭(別稱)이다. <後漢書 卷83 嚴光列傳><後漢書 逸民列傳>
  • 광무제[光武帝]  광무제는 한 고조(漢高祖)에 의해 세워진 서한(西漢)이 왕망(王莽)에 의해 망한 뒤에 다시 일어나 왕망을 무너뜨리고 동한(東漢)을 세운 임금으로, 본명은 유수(劉秀)이며, 남양(南陽)의 용릉(舂陵)에서 기병하였다. 동한(東漢)은 후한(後漢)의 별칭(別稱)이다.
  • 주공[周公]  희단(姬旦). 주(周) 문왕(文王) 희창(姬昌)의 넷째 아들이고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이름은 단(旦), 시호는 원(元)이다. 주공단(周公旦)라고도 부른다. 무왕(武王)을 도와 주(紂: 은殷)나라를 멸하였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周)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주례(周禮)를 지었다고 한다.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았다.
  • 관채[管蔡]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이자 주공(周公)의 형인 관숙(管叔) 선(鮮)과 채숙(蔡叔) 도(度)의 병칭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여 제후들의 반란을 염려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니, 관숙과 채숙은 “주공이 어린 왕에게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다.[公將不利於孺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주공이 동도(東都)로 피하였으나 성왕이 주공을 돌아오도록 하자, 관숙과 채숙은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끼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고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유배 보냈다. 주공이 관숙과 채숙을 처벌하고 나서 지은 시가 시경(詩經) 치효(鴟鴞)이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 주(註)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난 지 3년이 되었다.[周公東征已三年矣]”라는 말이 나온다. <書經 周書 金縢> <史記 卷35 管蔡世家>
  • 한요일두속[漢謠一斗粟]  한요(漢謠)는 한 문제(漢文帝)와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형제간의 은원(恩怨)의 고사(故事)로 민간에서 회남려왕(淮南厲王)을 위해 지어 부른 노래이다. 사기(史記)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에 “한문제(漢文帝)의 동생인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모반을 하였다가 실패하여, 폐위되어 촉군(蜀郡) 엄도현(嚴道縣)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먹지를 못해 굶어 죽었다. 민간인들이 노래를 지어 회남려왕(淮南厲王) 위해서 노래 부르기를 ‘한 자의 삼베도 꿰매면 입을 수 있고, 한 말의 좁쌀도 찧으면 나누어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漢文帝弟淮南王劉長謀反, 事敗被廢, 徙居蜀郡嚴道縣, 途中不食而死. 民間為此作歌謂:民有作歌歌淮南厲王曰:一尺布, 尚可縫;一斗粟, 尚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라고 보인다. 척포두속(尺布斗粟). 척포두속지기(尺布斗粟之譏).
  • 노인[路人]  길에 오고가는 사람. 피차에 관계가 없는 사람. 즉, 남이라는 뜻이다.
  • 소종[所從]  지내 온 내력. 지내 온 근본 내력.
  • 방촌[方寸]  마음[心]을 가리킨 것으로 심장(心臟)은 크기가 사방 한 치[寸]이며 마음이 심장 속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 외편(抱朴子外篇) 권1 가둔(嘉遯)에 “방촌의 마음은 다스려 내 안에 두어야 하니, 도망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方寸之心 制之在我 不可放之於流遁也]”라고 하였다. 또, 삼국 시대의 서서(徐庶)가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유비(劉備)를 도와 대업을 이루려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삼고 서서를 부르자, 서서가 유비에게 자심의 심정을 피력하여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과 패업을 도모하려고 한 것은 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지금 이미 노모를 잃었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여 어떤 일에도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니, 이 때문에 작별할까 합니다.[本欲與將軍共圖王覇之業者 以此方寸之地也 今已失老母 方寸亂矣 無益於事 請從此別]”라 하고는 마침내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 갔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 방촌[方寸]  사방 한 치가 되는 장부(贓腑).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심(心)의 육체적 위치를, 가슴 밑 배꼽 위 한 치[方寸] 되는 곳에 있다고 여겼다. 또한 심장의 크기가 사방 한 치인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간증보삼략(新刊增補三略)에 “심체(心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指心體而言]”라고 하였다.
  • 구의봉[九疑峯]  구의산(九疑山)의 봉우리를 이른다. 구의산은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데, 주명(朱明)・석성(石城)・석루(石樓)・아황(娥皇)・순원(舜源)・여영(女英)・소소(蕭韶)・계림(桂林)・재림(梓林) 등 아홉 봉우리가 모두 모양이 같아 보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므로 구의(九疑)라 이름 하였다 한다. 일명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순(舜) 임금의 무덤이 있다 하며 옆에 소상강이 있다. 순 임금은 순행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었는데, 그의 이비(二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소상강을 건너지 못하여 남편의 시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한다.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순이 제위(帝位)에 오른 지 39년에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여 강남(江南) 구의(九疑)에 장사 지냈으니, 이것이 영릉(零陵)이다.”라고 하였다.
  • 다화필조락[多花必早落]  개화필조락(開花必早落)으로 된 판본이 많다. 많은 친구는 반드시 일찍 소원(疏遠)해진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개화(開花) 말고 다화(多花)를 택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소나무도 꽃이 피고, 꽃의 수가 많기로도 비할 데가 없다.
  • 도리[桃李]  복숭아와 오얏. 문하생(門下生)이나 천거(薦擧)한 현사(賢士)를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일찍이 요숭(姚崇)・환언범(桓彦範)・장간지(張柬之) 등 수십 인을 천거하여 그들이 모두 명신(名臣)이 되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적인걸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도리(桃李)가 모두 공의 문하에 있다.[天下桃李 悉在公門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資治通鑑 卷207 則天順聖皇后><事文類聚 前集 卷30 仕進部>
  • 도리[桃李]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후배 또는 문도(門徒)를 가리킨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7에 “무릇 봄철에 복숭아나무나 자두나무를 심으면 여름에는 그늘 아래에서 쉴 수가 있고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다.[夫春樹桃李, 夏得陰其下, 秋得食其實.]”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때로는 젊은 날의 청춘을 이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다툰다는 의미로 소인배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혹은 복숭아와 오얏은 열매가 많이 달린다 하여 선대의 음덕을 받은 자손을 가리키기도 한다.
  • 관포[管鮑]  관포(管鮑)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어진 신하인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를 합칭한 말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로 포숙은 관중의 어짊을 잘 알아주었지만, 관중은 워낙 빈곤(貧困)하여 포숙을 항상 속이곤 하였다. 그러나 포숙은 끝까지 관중을 믿고 잘 대우해 주었다. 열자(列子) 구명(九命)에 “관중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 곤궁했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하였는데 내 몫으로 많이 이익을 취해도 포숙은 나를 욕심 많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라고 하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는 이야기가 나온다. <列子 九命><史記 卷62 管晏列傳 管仲> 관포지교(管鮑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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