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지룡[南陽之龍] 남양(南陽)의 용. 중국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지칭한다. 남양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현(縣)으로, 한나라 말기에 제갈량(諸葛亮)이 출세하기 전에, 남양현의 와룡강(臥龍岡)에 숨어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하였는데,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남양지세[南陽之世] 남양(南陽)의 시대란 광무제(光武帝)의 치세와 같이 학문이 흥성한 시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동한(東漢)을 세운 광무제는 남양 사람이어서 남양에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보기 드문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예악을 정비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그의 치세에 경학(經學)이 다시 융성하였다. 그러므로 문심조룡(文心雕龍) 정위(正緯)에서도 “광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 그의 교화에 크게 영향받아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至于光武之世 …… 風化所靡 學者比肩]”고 하였다.
남양지폐유[南陽之弊幽] 남양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이다. 처음에는 노(魯)나라 땅이었으나 뒤에 제(齊)나라 영토가 되었다. 폐유(弊幽)는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은거함을 뜻한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관중(管仲)은 비(鄙) 땅의 장사꾼으로 남양(南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고, 노(魯)나라에서 사형을 면하였으나 환공(桓公)이 등용하여 패자(霸者)가 되었다.[管仲, 其鄙人之賈人也, 南陽之弊幽, 魯之免囚, 桓公用之而伯.]”라고 한 데서 보인다.
남양처사[南陽處士] 남양의 처사는 양양(襄陽)의 남쪽 융중(隆中)에서 밭 갈며 숨어 살고 있던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남양천[南陽阡] 남양(南陽)은 지명이고 천(阡)은 무덤으로 가는 길로 한(漢)나라 때 유협(游俠)인 원섭(原涉)의 선영(先塋)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장례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 원섭전(原涉傳)에 “처음 무제(武帝) 때에 경조윤(京兆尹) 조씨(曹氏)가 무릉(茂陵)에 장사하고 그 묘도(墓道)를 경조천(京兆阡)이라 일렀는데 원섭(原涉)이 그것을 보고 선모(羨慕)하여 마침내 땅을 사서 묘도를 열고 표(表)를 세워 서(署)하기를 남양천(南陽阡)이라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얼른 따르지 아니하여 원씨천(原氏阡)이라 일렀다.”라고 하였다. 참고로 진사도(陳師道)의 시 첩박명(妾薄命)에 “예로부터 첩은 운명이 기구하여, 임 섬김에 해를 마치지 못하였네. 일어나 춤추어 임의 장수 빌었는데, 서로 남양의 무덤길로 전송하였노라.[古來妾薄命 事主不盡年 起舞爲主壽 相送南陽阡]”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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