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絶命詩四首절명시4수 / 절명시 / 黃玹황현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 겪다 어느덧 머리만 희어지고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고 목숨 버리려다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이제는 참으로 어찌 못할 상황이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 앞 촛불만이 하늘을 비추누나

妖氛晻翳帝星移[요분엄예제성이]   요기가 자욱 가려 제성이 옮겨가니

九闕沉沉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침침한 궁궐에는 낮 시간이 더디네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복유]   이제 다시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옥 같은 조칙 한 장에 눈물 천 줄기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찌푸리니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으로 식자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 위한 작은 공도 없었고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도 아니라네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결국에는 윤곡의 뒤나 따르게 되니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그때에 진동처럼 못한 것이 부끄럽네

<絶命詩四首절명시4/ 절명시 / 黃玹황현 : 梅泉集매천집>

※ 이 시는 일본에게 국권(國權)을 뺏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하면서 지은 절명시(絶命詩)이다.


  • 황현[黃玹]  조선 말기의 시인이자 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유교적 지식인으로 조선 말기와 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고종 20년(1883년)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제성[帝星]  황제의 별.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별로, 황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명(明)나라 남지(藍智)가 마애비(磨崖碑)라는 시를 지어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몽진(蒙塵)하는 상황을 읊으면서 “이때 요상한 기운이 당나라 기업(基業)에 침범하여, 황제의 별이 한낮에 서남쪽으로 옮겨 갔네.[是時妖孼侵唐基 帝星白日西南移]”라고 하였다.
  • 성인[成仁]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가 “지사와 인인은 삶을 구해서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루는 일이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음을 뜻한다.
  • 윤곡[尹穀]  남송(南宋) 말기 담주(潭州) 사람으로 자는 경수(耕叟), 호는 무실(務實)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사우(士友)들이 평소 그를 엄하게 여겼다. 중년에야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상덕추관(常德推官), 지숭양현(知崇陽縣), 지형주(知衡州) 등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 정직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모친상을 당한 이후로는 집에서 제생(諸生)을 교수(敎授)하면서 유자(儒者)의 행검(行檢)을 엄격히 준행하였다. 뒤에 원병(元兵)이 담주의 성(城)을 급격히 쳐들어오자, 수신(帥臣) 이불(李芾)의 참모(參謀)가 되어 성을 사수(死守)하던 중 불행히도 원병(援兵)이 이르지 않자, 그는 일이 이미 글렀음을 깨닫고 처자(妻子)들과 결별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선비로 국은을 입어 여러 주군을 다스렸으니, 의리상 적에게 굽힐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내가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吾以寒儒受國恩 典方州 誼不可屈 若輩必當從吾已耳]”라 하고, 아우 악수(岳秀)만을 불러 성을 나가서 살아남아 윤씨(尹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악수가 울면서 결별하였다. 그는 마침내 땔나무를 문 앞에 가득 쌓고 불을 질러 온 가족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다. 그가 순절하자 주학(州學)의 제생 수백 인이 가서 통곡하였고, 성이 끝내 함락된 뒤에는 그의 죽음에 감격하여 그와 같이 순절한 이가 또한 많았다. <宋史 卷450 忠義列傳 尹穀>
  • 윤곡[尹穀]  송(宋)나라 담주(潭州) 장사(長沙) 사람으로, 자는 경수(耕叟)이다. 평소 강직하고 염정(廉正)한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몽고(蒙古) 군대가 쳐들어와서 담성(潭城)을 포위하였을 때 막료로서 성을 방어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두 아들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사람들이 지금이 어떤 때인데 관례를 행하느냐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아이들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하고 지하에서 선인(先人)을 뵙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관례를 행하고 나서 처자(妻子)에게 뒤따라 죽을 것을 명한 뒤,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단정히 앉아 자결하였다. <宋史 卷450 尹穀列傳>
  • 진동[陳東]  송(宋)나라 윤주(潤州) 단양(丹陽) 사람으로 문신이자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자는 소양(少陽)이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휘종(徽宗)이 금(金)나라에 잡혀가고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소를 올려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을 몰아내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다시 시행하는 등 전횡을 일삼던 당시의 권신(權臣)인 채경(蔡京), 동관(童貫), 왕보(王黼), 이언(李彦), 양사성(梁師成), 주면(朱勔) 등 6인을 육적(六賊)으로 지목하고, 그들을 복주(伏誅)하여 천하에 사죄(謝罪)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高宗)이 남경(南京) 응천부(應天府)에서 즉위한 직후에 금(金)과의 항전을 주장하던 재상 이강(李綱)이 파직되자, 숭인(崇仁) 고을의 선비 구양철(歐陽澈)과 함께 제생들을 거느리고 선덕문(宣德門) 앞에 엎드려 이강을 유임시키고 주화파(主和派)인 재신(宰臣)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을 파직시킬 것을 청함과 동시에 사기를 진작시켜 동경(東京)으로 회군(回軍)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잠선의 무함으로 구양철(歐陽澈)을 함께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몇 년 뒤에 고종이 무고하게 죽인 것을 후회하여 비각수찬(祕閣修撰)에 추증함으로써 민심을 무마하였다. 진동은 죽음에 임박해서도 부친에게 남기는 편지를 손수 쓰면서 자획(字畫)이 평소와 다름없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감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말을 한 이상 죽음을 피하려 하겠는가.[畏死即不敢言, 已言肯逃死乎.]”라고 하고는 형장으로 향하였다 한다. <宋史 卷455 忠義列傳 陳東>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