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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동궁[盧矢彤弓]~노시유서[盧詩劉序]~노시칠완[盧詩七椀]


노시[玈矢]  검은빛으로 꾸민 화살로, 왕이 신하의 전공(戰功)에 보답하거나 정벌을 명할 때 하사하는 병기의 한 가지이다.

노시경편[魯詩駉篇]  경(駉)은 시경(詩經) 노송(魯頌)의 편명으로, 노(魯) 나라 사관(史官) 극(克)이 희공(僖公)의 목마(牧馬)를 칭송한 시이다.

노시동궁[盧矢彤弓]  노시(玈矢)는 검은 화살이고, 동궁(彤弓)은 붉은 활인데, 주 평왕(周平王)이 진 문후(晉文侯)를 방백(方伯)에 임명하면서 동궁과 노시를 하사하였다. <書經 文侯之命>

노시승리대[魯詩承鯉對]  노시는 공리의 대답을 계승함. 가전지학(家傳之學)을 이른 말로, 공자가 아들인 공리(孔鯉)에게 시경을 읽었느냐고 묻자, 아직 읽지 못했다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노시어허주[盧侍御虛舟]  노허주(盧虛舟)를 가리킨다. 자는 유진(幼眞)이고 범양(范陽) 사람이며 당나라 숙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노시유서[盧詩劉序]  당나라 노상(盧象)의 시에 한식 풍속을 두고 “개자추가 세상을 피하여, 산에 불을 놓자 타 죽었네. 사해가 똑같이 찬밥을 먹으니, 천추에 한 사람을 위해서로다.[子推言避世 山火遂焚身 四海同寒食 千秋爲一人]”라고 읊었다. 또 한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에 “개자추가 작록을 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개산(介山)으로 떠나갔다. 진 문공(晉文公)이 그를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지르면 필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을 질렀으나 결국 나오지 않고 타죽었다.”라고 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8 禁煙鑽火>

노시칠완[盧詩七椀]  노시는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의 시를 말한 것으로 즉 노동의 주필사맹간의기신차(走筆謝孟諫議寄新茶)를 가리키는데, 그 대략에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 주고, 둘째 잔은 외로운 시름을 떨쳐 주고,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를 더듬어서, 뱃속엔 문자 오천 권만 남았을 뿐이요,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흐르게 하여, 평생에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져 나가네 하네. 다섯째 잔은 기골을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선령을 통하게 해 주고, 일곱째 잔은 다 마시기도 전에 또한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이는 걸 깨닫겠네.[一椀喉吻潤 二椀破孤悶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四椀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라고 하였다.

노식[盧植]  후한 때 사람으로 자는 자간(子幹)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이다. 젊었을 때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하여 고금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마융이 기녀들을 장막 앞에 불러 춤추고 노래하게 하였지만, 노식은 몇 년 동안 시강(侍講)하면서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아 스승의 존중을 받았다. 소제(少帝)의 폐출을 항쟁하다 동탁(董卓)에게 면관(免官)되어, 상곡(上谷)에서 은거했다. 저작으로는 상서장구(尙書章句)・삼례해고(三禮解詁)가 있으며, 채옹・양표(楊彪)・한설(韓說)과 함께 한기(漢記)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後漢書 卷64 盧植列傳>

노식[盧植]  노식은 젊어서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하였는데, 강직하고 대절(大節)이 있어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할 때에도 그 홀로 항론(抗論)하였다. 처음에 대장군 두무가 영제(靈帝)를 세우고 정권을 잡자 조정에서 그에게 봉작(封爵)을 가하려 하였는데, 그때 노식이 포의(布衣)로서 충고하기를 “어찌 천공(天功)을 탐내어 자기 공으로 삼으려 하는가. 대상(大賞)을 사양하여 몸을 보전하라. …… 그리고 왕족과 종실의 훌륭한 자제들을 불러들여 …… 근간이 되는 경사(京師)를 강화하고 가지가 되는 사방을 약화시키라.” 하였으나, 두무가 모두 제대로 쓰지 못했다. <後漢書 卷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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