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서강하인사의[論西羌夏人事宜] 귀장(鬼章)을 생포한 일을 계기로 변방 오랑캐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여 올린 글이다. <東坡集 卷54 因擒鬼章論西羌夏人事宜箚子>
논서역[論西域] 장건(張騫)은 서한(西漢) 때 두 차례 서역(西域)으로 출사(出使)한 적이 있으며, 반용(班勇)은 동한(東漢) 때 서역장사(西域長史)를 맡은 적이 있는데 모두 기공(奇功)을 세운 적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말하기를 “불도(佛道)의 신화(神化)가 신독(身毒: 인도印度)에서 일어났으나 두 한(漢)나라(前漢・後漢)의 방지(方志)에는 칭한 것이 없다. 장건(張騫)은 다만 땅이 매우 덥고 습하며 코끼리를 타고 싸운다고 기록하였을 따름이다. 반용(班勇)은 비록 그들이 부도(浮圖)를 받들고 살벌하지 않음을 열거하였으나 문장이 정밀하고 법에 뛰어나며 이끈 공에 대해서는 전술(傳述)한 것이 없다.”라 하였다.
논섬서자의용위민환[論陝西刺義勇爲民患] 영종(英宗) 연간에 서하(西夏)의 군대가 변방을 침입하자, 당시 재상으로 있던 한기(韓琦)는 병력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섬서성(陝西省)에서 20만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때 간관으로 있던 사마광(司馬光)은, 이 조치가 병제의 근간을 흔들고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는 실정(失政)이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처음 영종(英宗) 치평(治平) 원년(1064) 11월에 사마광(司馬光)은 걸파섬서의용서(乞罷陝西義勇書)를 올려 의용군의 모집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자주 그 잘못을 힘써 말하였다. ‘자의용(刺義勇)’은 송대(宋代)에는 군대를 모집함에 있어 금군(禁軍)과 상군(廂軍)은 반드시 얼굴에 자자하여 병사임을 표시하였고,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義勇軍)은 얼굴이 아니라 손등에 자자하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논성답고[論性答藁] 논성답고(論性答藁)란 바로 주희(朱熹)가 성리설(性理說)에 대해서 여러 사람에게 회답해 준 초고(草藁)를 가리킨다.
논심[論心] 경심교담(傾心交談)과 같은 말이다.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 이야기함을 뜻한다.
논양현차자[論養賢箚子] 연영원을 설치해서 인재를 모아 함께 생활하게 하면서 인재로서의 등급을 살핀 연후에 관직에 등용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정문집(二程文集) 권2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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