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뇌유[賂遺]~뇌윤공[雷允恭]~뇌의송금[雷義送金]~뇌의진중[雷義陳重]


뇌유[賴有]  ~이 있어 의지하다. ~의 덕분이다. ~하니 다행이다.

뇌유[賂遺]  뇌유란 지방관 등 하급관리가 중앙의 상급 관청이나 관리에게 보내는 선물의 통칭으로서, 글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뇌물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뇌윤공[雷允恭]  송(宋) 개봉(開封)사람으로, 환관이다. 주회정(朱懷政)의 천서위조(天書僞造)를 미리 적발하였고 장헌태후(章獻太后)가 처음 정사를 맡았을 때 정위(丁謂)와 서로 내통하여 권세를 휘둘렀다.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능혈(陵血)을 잘못 정한 일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뇌윤공[雷允恭]  송 진종(宋眞宗)의 상사 때 뇌윤공(雷允恭)이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있을 적에 산릉사(山陵使)인 정위(丁謂)와 공모하여, 진종(眞宗)의 후(后)인 장헌후(章獻后)의 신중히 하라는 명도 듣지 않고 애초 잡은 데를 두고 위 혈(穴)을 쓰도록 주장하였는데, 파 보니 돌이 나오고 돌이 나온 다음에 물이 나왔다. 그래서 둘 다 그 일로 죄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宋史 卷468 宦者列傳 雷允恭>

뇌음[雷音]  뇌음(雷音)은 불교에서 쓰는 말로, 부처가 설법하는 소리가 마치 뇌성이 치는 소리와 같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뇌의송금[雷義送金]  뇌의(雷義)가 죽은 사람의 황금을 되돌려 준 고사이다. 몽구(蒙求)에 “후한 뇌은의 자는 중공이니, 예장의 번양 사람이다. 처음에 군의 공조가 되었는데, 착산 사람을 발탁하여 천거했으나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뇌의가 일찍이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구제해 주었더니, 그 죄인이 뒤에 금 두 근으로 사례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받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뇌의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남몰래 방의 천장 위에 놓아두었다. 뒤에 지붕을 수리하다가, 그 금을 발견하였는데, 금을 준 사람은 이미 죽어서 돌려 줄 곳이 없게 되자, 이에 현조에 기부하였다. 그 후 시어사에 임명되고 남돈령에 제수 되었다.[後漢雷義字仲公 豫章鄱陽人. 初爲郡功曹 擢擧善人不伐其功. 義嘗濟人死罪. 罪者後以金二斤謝. 不受. 金主伺義不在 黙投金於承塵上. 後葺理屋宇 乃得之. 金主已死 無所復還. 乃以付縣曹. 後拜侍御史 除南頓令.]”라고 보인다.

뇌의진중[雷義陳重]  후한 때의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같은 마을 사람으로 친한 사이였는데, 태수가 진중(陳重)을 효렴(孝廉)으로 추천하자 진중은 뇌의(雷義)에게 양보하였으나 태수의 거절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뇌의를 무재(茂才)로 추천하자 이번에는 뇌의가 진중에게 양보했으나 이 역시 자사의 거절로 이뤄지지 않게 되자 뇌의는 머리를 산발하고 거짓으로 광인 행세를 하며 떠났다고 한다.

뇌의진중[雷義陳重]  후한(後漢) 때의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은 젊어서부터 교정(交情)이 매우 두터워 일찍이 태수가 진중을 효렴(孝廉)으로 천거했을 때는 진중이 이를 뇌의에게 양보하여 뇌의 또한 그 명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뒤에 둘이 똑같이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다가 뇌의가 파출되자 진중 또한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후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어서는 이를 진중에게 양보했으나 자사가 들어주지 않자, 뇌의는 마침내 거짓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무재의 천거에 끝내 응하지 않았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교칠이 스스로 견고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의 사이만은 못하리라.[膠漆自謂堅, 不如陳與雷.]”라고 했다 한다. <後漢書 卷81 陳重雷義列傳>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