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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사[陋笥]~누사덕[婁師德]~누사상빙[屢辭商聘]~누상[樓桑]


누사[陋笥]  좁은 상자. 저의 집. 자신의 집에 대한 겸칭이다.

누사[樓榭]  다락집으로 된 정자(亭子)이다.

누사덕[婁師德]  당대(唐代)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대신이다. 자는 종인(宗仁)이고 시호는 정(貞)이다. 정주(鄭州) 원무(原武) 사람이다. 30년 동안 장상(將相)으로 있으며 변방 일을 도맡아 보았다. 그 아우가 자급(資級)이 높아 대주자사(代州刺史)으로 제수되어 부임하려 하자,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에 재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재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네가 또 주(州)의 수령이 되어 가니,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맡았다고 사람들이 질시할 것이다. 너는 장차 어떻게 소임을 마치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그 아우가 “이제부터는 남이 저의 뺨에 침을 뱉더라도 감히 대꾸하지 않고 스스로 닦음으로써 형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해서는 나의 근심거리가 되기에 알맞다. 대저 사람이 침을 뱉는 것은 노여움에서 나온 행동인데, 네가 그것을 닦는다면 이는 그 사람의 노여움을 거스르는 행동이 될 것이다. 침은 닦지 않아도 절로 마를 터이니, 차라리 웃으며 감수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그 아우가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新唐書 列傳 卷108> <舊唐書 卷13>

누사덕[婁師德]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명재상이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후덕하였는데, 명재상인 적인걸(狄仁傑)이 재상이 된 것은 실로 그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으나 적인걸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시하여 여러 번 비판하였다. 측천무후가 이것을 알고 적인걸에게 “누사덕이 인재를 알아보는가?”라고 묻자, 적인걸은 “신이 일찍이 그와 동료가 되었으나 그가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측천무후가 “짐이 경(卿)을 안 것은 바로 누사덕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 또한 인재를 알아본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자, 적인걸이 밖으로 나와 한탄하기를 “누공(婁公)의 거룩한 덕을 나는 측량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누사상빙[屢辭商聘]  상(商)나라 군주는 탕(湯) 임금을 이른다. 만장(萬章)이 맹자(孟子)에게 이윤이 탕 임금에게 고기를 요리해 바쳐 등용된 것인지를 물었는데, 맹자가 그렇지 않다고 답하며 “탕 임금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보내어 그를 초빙하였으나 그는 욕심 없는 모습으로 말하기를, ‘내가 탕 임금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을 이유가 뭐 있는가. 어찌 이대로 들녘에서 농사지으며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湯使人以幣聘之, 囂囂然曰:我何以湯之聘幣爲哉? 我豈若處畎畝之中, 由是以樂堯舜之道哉?]”라고 말하였다. <孟子 萬章上>

누상[樓桑]  촉한(蜀漢)이 소열제(昭烈帝)가 소싯적에 그 집 동남쪽에 있던 5장(丈)쯤 된 뽕나무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레의 깃일산처럼 보였으므로, 그 나무 밑에서 장난말로 “내가 후일에 반드시 이 깃일산 수레를 탈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뒤에 그 마을을 누상리(樓桑里)라 명명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제왕의 고향을 의미한다.

누상가인[樓上佳人]  고려 장일(張鎰)의 시 연자루(燕子樓)에 “찬 달빛아래 처량한 연자루, 낭관 떠나고 나니 꿈만 아득해라. 이러한 때에 자리의 객들이여 늙음을 마다 마오, 누대 위의 가인도 백발이라오.[霜月凄凉燕子樓 郞官一去夢悠悠 當時座客休嫌老 樓上佳人亦白頭]”라고 하였다.

누상인수옥저간[樓上人垂玉箸看]  당(唐)나라 장갈(章碣)의 시 춘별(春別)에 “꽃 가의 말은 금재갈을 씹으며 떠나고, 누각 위의 사람은 옥젓가락을 놓고 바라보네.[花邊馬嚼金銜去 樓上人垂玉箸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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