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情卻似總無情[다정각사총무정] 많은 정에도 내내 정 없듯이 하려니
唯覺樽前笑不成[유각준전소불성] 술잔 앞에 두고도 웃을 수가 없구나
蠟燭有心還惜別[납촉유심환석별] 밀랍촛대 도리어 석별의 맘 있는 듯
替人垂淚到天明[체인수루도천명] 사람 대신 날 밝도록 눈물 흘리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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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別二首二증별2수2 / 이별하며 주다 / 杜牧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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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별[贈別] 작별의 정을 담은 시나 노래를 지어 주고 헤어짐. 떠나는 사람에게 정표(情表)로 시나 노래 따위를 지어 주면서 작별함. 헤어질 때 서로에게 물품이나 시문 등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이별의 시에는 송별(送別)‧증별(贈別)‧유별(留別)의 세 가지가 있다. 송별시는 이별에 임하여 시를 써서 멀리 떠나가는 이에게 주는 것이고, 증별시 역시 송별시와 마찬가지이다. 유별시는 송별시와는 반대로, 멀리 떠나는 사람이 전송하러 나온 사람에게 써서 주어 기념으로 삼게 하는 것이니 유증(留贈)이라 할 수도 있다.
- 두목[杜牧] 만당(晩唐)의 문장가이자 시인으로 자(字)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경조(京兆) 만년(萬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사족(士族) 출신이다. 고시(古詩)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는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고,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병법에도 밝아 손자(孫子)에 주석을 내어 손자십가주(孫子十家註)에 들어 있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용병술을 논한 죄언(罪言)을 지어 황제에게 올린 바 있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냈고, 사관수찬(史舘修撰)・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중서성의 별칭이 자미성(紫微省)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두자미(杜紫微)라고 불렀고,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내서 두사훈(杜司勛)이라고도 불렀으며, 두보(杜甫)와 구별하기 위해 두보를 대두(大杜) 또는 노두(老杜)라고 하고 두목을 소두(小杜)라고 불렀고, 또 이상은(李商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하여 소이두(小李杜)라고도 불렀는데 이백과 두보의 병칭인 이두(李杜)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안 남쪽 번천(樊川)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게 된 만년에는 두번천(杜樊川)으로 불렸다. 두목은 당조(唐朝)에서 이름이 높은 경조두씨(京兆杜氏)로 서진(西晉)의 군사가인 두예(杜預)의 16세손이다. 두목과 두보는 같은 두예의 후예였지만 그 지파가 달랐는데, 두보는 두예의 아들 두탐(杜耽)의 후예였고, 두목은 두예의 다른 아들 두윤(杜尹)의 후예였다. 저작으로 번천문집(樊川文集) 20권이 있다.
- 각사[卻似] 도리어 이와 같다. 도리어 ~과 같다.
- 납촉[蠟燭] 밀랍(蜜蠟)으로 만든 초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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