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지화[黨錮之禍] 당쟁(黨爭)에 연루되어 화를 당한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 환제(東漢) 때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주도하자, 사대부였던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 곽태(郭泰), 가표(賈彪) 등과 연합하여 환관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오히려 그들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난했다고 무고하여 이응 등 200여 명을 체포하여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을 받게 하였고, 영제(靈帝) 때에 이응 등이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모의하여 환관을 주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는 바람에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사실을 당고지화(黨錮之禍)라고 불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당고지화[黨錮之禍] 후한(後漢) 시대 때 환관(宦官)들에 의하여 여러 선비들이 도륙당한 화를 말한다. 후한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여러 선비들이 환관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당인(黨人)으로 몰려 종신토록 금고(禁錮)되는 화를 당하였으며, 그 후 당인들이 다시 중신(重臣) 두무(竇武) 등과 의논하여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패해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600여 명이 금고되었다. 장양(張讓)은 이 당시에 환관으로 있으면서 당고의 화를 주도하였던 자인데, 영제가 그를 몹시 신임하여 “장 상시(張常侍)는 나의 아버지이다.”라고까지 하였으나, 나중에 원소(袁紹)가 서울로 쳐들어오자 소제(少帝)를 모시고 도망쳤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 진식(陳寔)은 당고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는데도 “내가 감옥에 갇히지 않으면 사람들이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스스로 감옥에 갇혔다가 끝내는 사면받아 풀려났으며, 뒤에 여러 차례 높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채 집에서 지냈는데, 그가 죽자 조문객으로 온 사람이 3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78 宦者列傳 張讓, 卷62 陳寔列傳>
당고지화[黨錮之禍] 후한시대(後漢時代)에 두 번에 걸쳐 발생한 당고(黨錮)의 옥사를 이르는데, 당고(黨錮)는 붕당(朋黨)의 무리를 금고(禁錮)시킨다는 의미이다.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에 외척들을 주살하고 환제(桓帝)가 친정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이 공을 세워 정권을 잡았다. 이로 인해 환관들에 의한 정치적 폐단이 심해지자,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응(李膺)과 태부(太傅)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太學生)들과 연합하여 스스로 청류(淸流)라 칭하며 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주동하여 연희(延熹) 9년(166) 조령(詔令)을 내려 청류(淸流)의 당인(黨人) 200여 명을 체포하고, 다음 해에 당인(黨人)의 금고조령(禁錮詔令)을 내려 이들을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제1차 당고(黨錮)의 옥사이다. 환제(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하간효왕(河間孝王)의 증손(曾孫)인 영제(靈帝)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겨우 12세였다. 외척 두무(竇武)가 정권을 장악하고 진번(陳蕃)과 함께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반역죄로 몰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여 이응(李膺), 두밀(杜密) 등을 주륙하고 당인(黨人)과 태학생(太學生)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두 폐출하거나 금고(禁錮)하니, 이것이 제2차 당고(黨錮)의 옥사이다. <後漢書 黨錮列傳>
당고현인[黨錮賢人] 후한(後漢) 때 권세와 횡포가 심한 환관(宦官)들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화를 당한 진번(陳蕃), 이응(李膺) 등 여러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말한다. 후한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진번, 이응 등 여러 선비들이 환관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당인(黨人)으로 몰려 종신금고(終身禁錮) 되는 화를 당하였으며, 그 후 당인들이 다시 중신(重臣) 두무(竇武) 등과 의논하여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패배당해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600여 명이 금고(禁錮)되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당공[棠公] 제(齊)나라 당읍(棠邑)의 대부(大夫)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5년 조에 “제(齊) 나라 당공(棠公)이 죽자 미인이었던 그의 처를 최저(崔杼)가 취했는데, 그 여자를 장공(莊公)이 자주 사통(私通)하다가 최저(崔杼)의 집에서 시해되었다. 이때 문이 닫힌 최저의 집 문 밖에 안자가 서서 사람들의 물음에 답하기를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거나 망명한다면 신하도 그와 함께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그러나 임금이 개인적인 일로 죽거나 망명할 경우, 사적으로 가까이 모시던 사람들 외에 누가 책임지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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