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천[大羅天] 대라천. 상상의 천계(天界)로 선계(仙界)의 뜻으로 쓰인다. 삼계(三界)의 밖은 사인천(四人天)이라 하고 사인천 밖은 삼청(三淸)이라 하고 삼청의 위는 대라천이라 한다. 대라천의 위에 또 구천(九天)이 있다고 한다. <酉陽雜俎 玉格> 이상은(李商隱)의 시 유증외지(留贈畏之)에 “부질없이 대라천 위의 일에 기탁하여, 신선들이 같은 날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노래하네.[空寄大罗天上事, 衆仙同日咏霓裳.]”라고 하였다.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은 중국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선악(仙樂) 이름. 현종이 꿈에 방사(方士)와 월궁(月宮)에서 놀다가 그 음악을 듣고 돌아와 지었다는 설과, 양경충(楊敬忠)이 지어 바쳤다는 설과, 양경술(楊敬述)이 지었다는 설 등이 있다.
대납언[大納言] 태정관(太政官)의 차관인데, 국정에 참여하여 가부를 천황에게 아뢰고 선지(宣旨)를 전달하던 벼슬이다. 아래로 중납언(中納言)·소납언(少納言)이 있다.
대내[大內] 대내는 일반적으로 황궁(皇宮)의 총칭이다. 황제의 재화(財貨)나 기물을 넣어 둔 창고,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내실 등을 의미하는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대내[大內] 임금을 비롯하여 왕비, 왕대비들이 거처하는 곳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임금이 거처하는 곳은 대전(大殿), 왕비가 거처하는 곳은 중전(中殿)이라 하고 대비가 거처하는 곳을 대비전(大妃殿)이라 하는데, 대내는 이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대내[大內] 임금의 침전(寢殿)을 이르는 말이나, 임금의 궁궐을 범연히 가리키기도 한다.
대내[大內] 황궁(皇宮)을 말한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논불골표(論佛骨表)에 “지금 듣건대 폐하께서 승려들을 시켜 봉상(鳳翔)으로 가서 불골(佛骨)을 맞이해 오게 하여, 루대(樓臺)에 올라 관람하고서 이것을 실은 가마를 대내(大內: 황궁皇宮)로 들이시고, 또 여러 사찰(寺刹)에 명하여 이 불골(佛骨)을 맞이해 돌려가며 공양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今聞陛下令群僧迎佛骨於鳳翔, 御樓以觀, 舁入大內, 又令諸寺遞迎供養.]”라고 하였다.
대내[臺萊] 시경(詩經)에 “남산에는 대가 있고 북산에는 내가 있다.[南山有臺 北山有萊]”라는 시가 있다. 대(臺)와 내(萊)는 나물 이름이다. 이 시는 어진 인재를 얻은 것을 읊은 것이다.
대내관직[大耐官職] 주로 내관(耐官)으로 쓰여 어떠한 영욕(榮辱)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송나라 진종(眞宗) 때의 재상인 상민중(向敏中)이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었을 때 누구의 축하도 받지 않고 연회도 열지 않았다. 이에 진종이 “상민중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처리할 것이다.[向敏中大耐官職.]”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宋史 卷282 向敏中列傳>
대내씨[大內氏] 대내씨는 일본 남북조 시대부터 실정 시대까지 주방(周防), 장문(長門), 풍전(豐前), 축전(筑前) 일대를 지배한 수호대명(守護大名)이다. 일설에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의 자손이라고 한다. 지방 호족으로서 12~13세기경 주방권개(周防權介)를 세습하였으며, 대내홍세(大內弘世) 때에 족리씨(足利氏)에 속해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후 본거지를 산구(山口)로 옮겨 발전하였다. 그의 아들 의홍(義弘) 때에는 6개 국의 수호직(守護職)을 겸임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대대로 명 나라와 조선과의 교역으로 부강함을 자랑하였다. 응영(應永)의 난(1399, 조선 정종1) 때에 일시 쇠퇴하였지만 의흥(義興) 대에 이르러 10대 장군 족리의식(足利義植)의 관령(管領)이 된 후 의륭(義隆) 대에는 7개 국의 수호(守護)를 겸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1551년 가신(家臣) 도청현(陶晴賢)에게 멸망당하였다.
대내장미염이후족[待內藏米鹽而後足] 송사(宋史)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내장(內藏)은 곧 별장(別藏)이다. 정상 지출은 좌장고(左藏庫)에서 지출한다. 별장(別藏)은 군려(軍旅) 및 기근(饑饉)의 급변에 대비한 것이니, 좌장고(左藏庫)의 비축이 부족할 경우, 별장(別藏)의 비축으로 보충하였다.”고 한다.
대내전[大內殿] 조선에 사신을 보내오던 일본 호족의 하나이다. 대내씨(大內氏)는 일본 장문(長門) 지방을 지배하던 호족(豪族)이었다. 전(殿)은 그들을 존칭하는 말인데 옛날 사람들이 일본 풍속을 몰라서 존칭까지 붙여서 말한 것이다. 14세기 중엽부터 일본의 규슈(九州) 동북부와 주코쿠(中國) 남부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 가보(家譜)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후손으로서 백제가 망하자 성명왕(聖明王)의 셋째 아들 임성(林聖)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스오오(周防)의 다다라하마(多多良濱)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은 오오우치무라(大內村)에서 살았다고 하여 성(姓)을 다다라, 씨(氏)를 오오우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계통이 백제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선과 가장 친근하여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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