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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약욕[大白若辱], 대백우중[大伯虞仲], 대백의[大帛衣], 대백지관[大帛之冠]


대백약욕 성덕약부족[大白若辱 盛德若不足] 진짜 맑고 깨끗한 것은 때묻은 것처럼 보이고 정말로 충실한 덕은 부족한 것처럼 보임. 춘추 시대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일찍이 여관에 묵을 적에 처음에는 그가 예모(禮貌)를 엄격히 차린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대접했다. 그 모습을 본 노자(老子)가 양자거에게 가르침을 줄 수 없노라고 말하였다. 양자거가 무릎을 꿇고 다가가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누가 그대와 함께 하겠는가? 큰 결백함은 굴욕과 같고, 성대한 덕은 부족한 것과 같은 법이다.[而睢睢盱盱, 而誰與居? 大白若辱, 盛德若不足.]”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양자거가 태도를 바꾸자 여관에 든 사람들이 서로 그의 옆에 앉으려고 좌석을 서로 다툴[爭席]정도가 되었다는, 장자(莊子) 우언(寓言)에 보인다.노자(老子) 제41장에도 “정말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광대한 덕은 부족한 듯하다.[大白若辱 廣德若不足]”라고 하여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또, 사기(史記) 노자열전(老子列傳)에도 노자가 공자를 꾸짖으면서 “군자가 덕이 성대해지면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하다. 그대의 교만한 기색과 많은 욕심, 태만한 태도와 지나친 뜻을 없애라.[君子盛德 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라고 한 비슷한 대목이 보인다.

대백우중[大伯虞仲]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모두 주 태왕(周太王)의 아들로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함께 왕위(王位)을 사양하고서 오(吳)로 갔다. 뒤에 주(周)가 중옹(仲雍)의 지자(支子)를 서오(西吳)에 봉하였는데, 우공(虞公)은 바로 그 후손이다. 목(穆)이 소(昭)를 낳고 소(昭)가 목(穆)을 낳으니, 세계(世系)의 차례로 계산하면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주 태왕(周太王)의 소(昭)가 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조에, “태백(大伯)과 우중(虞仲)은 태왕(太王)의 아들인데, 태백이 따르지 않아 이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였다.[大伯虞仲, 太王之昭也. 泰伯不從, 是以不嗣者.]”라고 하였다. 대백(大伯)은 태백(太伯)·태백(泰伯)이라고도 한다.

대백의[大帛衣]  거친 천으로 만든 옷으로, 검소한 덕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나라 명제의 비인 명덕마황후(明德馬皇后)가 황후가 되어서도 더욱 겸손하고 자숙하여 항상 대련복(大練服)을 입고, 치마[裙]에는 단[緣]을 붙이지 않았으며,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내니, 육궁(六宮)의 사람들이 모두들 탄복하였다. <後漢書 卷10上 皇后紀 明德馬皇后>

대백지관[大帛之冠]  거친 명주로 지은 관. 위 문공(衛文公)은 나라가 어려울 때 초구(楚丘)에 성을 쌓아 위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거친 삼베로 만든 옷[大布之衣]을 입고, 거친 삼베로 만든 관[大帛之冠]을 쓰고, 백성과 고락(苦樂)을 함께하여 위나라를 부흥시켰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2년에 “위 문공(衛文公)이 거친 베옷에 거친 명주로 지은 관을 쓰고서 목재를 축적하고 농사를 가르치며, 물자를 유통시키고 공인을 우대하며, 교육을 중시하고 학문을 권장하며, 관리의 도리를 가르쳐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니, 희공 원년에 30승이던 병거가 계년에는 300승이 되었다.[衛文公大布之衣, 大帛之冠, 務材訓農, 通商惠工, 敬敎勸學, 授方任能, 元年革車三十乘, 季年乃三百乘.]”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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