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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의돈[陶走猗頓], 도주전령[盜鑄錢令], 도주지공[陶鑄之功], 도주지부[陶朱之富]


도주의돈[陶走猗頓]  도주(陶走)와 의돈(猗頓)과 같은 큰 부자라는 뜻으로, 막대(莫大)한 재산(財産)이나 돈이 많은 부자를 이르는 말이다. 도주는 도주공(陶朱公)이니 범려(范蠡)를 이름이며, 의돈(猗頓)은 황하(黃河) 기슭 의씨(猗氏)가 남쪽에서 소와 양을 먹이며 크게 재물을 모았다고 하여 의돈(猗頓)이라 이르니, 둘 다 옛날 중국춘추시대의 이름난 부자, 오늘날 부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도주의돈부[陶朱依頓富]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부유함이라는 말로, 대단한 부자를 뜻하는 고사성어이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는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수중에 재물과 주옥을 감추고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과 호수를 건너 바다로 나가 제나라로 가서는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꾸고 생활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재산을 증식하여 수천 만금에 이르렀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상으로 임명했다. 범려는 한탄하며 “집에는 천금이 있고, 관직은 재상이 되었구나. 이것은 평민으로서는 최고의 출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존경을 받는 것은 불길한 일이다.”라고 말하고는 재상의 인을 반환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중요한 보물만을 가슴에 안고 길을 떠났다. 며칠을 가다가 도라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칭 도주공이라 칭하고 거만의 재산을 모았다. 노나라 사람 의돈이 범려를 찾아가 재산 증식 방법을 묻자, 이렇게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의씨라는 곳에서 소와 양을 대규모로 사육하였다. 그 또한 10년 사이에 왕공이 될 정도의 새산을 모았다. <十八史略십팔사략>

도주전령[盜鑄錢令]  한 문제(漢文帝) 때에 백성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였던 법령이다. 도주전령을 폐지하자 가의(賈誼)와 가산(賈山)이 글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효문제(孝文帝)는 끝내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주지공[陶鑄之功]  도주(陶鑄)의 솜씨. 도공(陶工)처럼 만물을 빚어내는 조화의 솜씨라는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고야산(姑射山)의 신인(神人)은 먼지와 때 그리고 쭉정이와 겨 같은 것을 가지고도 도공처럼 요순을 빚어낼 수 있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외물을 일삼으려고 하겠는가.[是其塵垢粃糠 將猶陶鑄堯舜者也 孰肯以物爲事]”라는 말이 나온다.

도주지부[陶朱之富]  도주공(陶朱公)의 부(富)란 뜻으로 큰 부를 일컫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고대의 최고 부자를 말한다. 중국에서 부자의 대명사로 지칭하는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도주(陶朱)와 의돈(猗頓)이다. 이 때문에 부자를 가리켜 도의라고 하고 그 부를 일러 ‘도주와 의돈의 부[陶朱猗頓之富]’라고 한다.

도주지지[陶朱之智]  도주(陶朱)의 지혜. 도주는 재산이 많은 부자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도주는 춘추(春秋) 시대 월(越)나라 정승 범려(范蠡)이다. 범려는 월왕(越王)을 도와 오(吳)를 격파한 뒤에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가서 성명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었다. 제왕(齊王)이 그를 승상으로 삼자, 범려는 승상인(丞相印)을 돌려주고 재물을 다 흩어 친지와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어진 일을 하고서, 도(陶)로 가서 다시 재산을 모아 억만장자가 되니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으로 불렀다고 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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