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공대아[陶朱公大兒] 도주공(陶朱公)의 맏아들. 도주공(陶朱公)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재상이었던 범려(范蠡)이다. 구천(句踐)과 힘을 합하여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월(越)나라를 떠나 거부(巨富)가 되었을 때, 그의 둘째 아들이 죄를 지어 초(楚)나라의 옥에 갇혔다. 범려(范蠡)는 자식의 구명을 위해 막내아들을 보내려 하였지만, 맏아들이 장남으로서 체면을 내세우며 필사적으로 자신이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므로 하는 수 없이 맏아들을 보내었다. 하지만 범려(范蠡)가 우려한 대로 구명하러 갔던 큰아들이 재물을 아끼려다 결국 둘째 아들을 잃고 말았다는 고사가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나온다. 재물을 아끼려다 낭패하게 된 사람을 비유한다. <전문보기>
도주공장자[陶朱公長子] 도주공(陶朱公)의 맏아들. 범려(范蠡)의 둘째 아들을 구명하러 갔던 큰아들이 재물을 아끼려다 결국 둘째 아들을 죽게 하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였다. 재물을 아끼려다 낭패하게 된 사람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나오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 도주공(陶朱公)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재상이었던 범려(范蠡)이다. 구천(句踐)과 힘을 합하여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월(越)나라를 떠나 거부(巨富)가 되었을 때, 그의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楚)나라의 옥에 갇혔다. 범려(范蠡)는 자식의 구명을 위해 막내아들을 보내려 하였지만, 맏아들이 장남(長男)으로서 체면을 내세우며 필사적으로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므로 하는 수 없이 맏아들을 보내다. 도주공(陶朱公)의 장남(長男)이 아버지의 당부에 따라 금전을 가지고 장생(莊生)에게 가서 사면을 부탁하니 장생이 장남에게 즉시 떠날 것을 다짐받고 초왕(楚王)에게 대사면을 실시할 것을 상주하였다. 장남은 동생이 풀려날 상황이 되자 장생에게 주었던 금을 아깝게 여겨, 장생에게 찾아가 금을 돌려받고 싶은 내색을 하자 장생이 금을 돌려주었다. 장생은 장남이 약속을 어긴 것을 괘씸하게 여겨 초왕에게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들 ‘도주공은 부자이고 또 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수감되자 그 집에서 금전을 가지고 왕의 좌우에 뇌물을 준다’고 말들을 합니다.[道路皆言, 陶之富人, 朱公之子殺人, 囚楚, 其家多持金錢, 賂王左右.]”라고 아뢰자, 초왕이 노하여 주공의 둘째 아들을 사형시키고, 그 다음 날 사면을 실시하였다. 주공의 맏아들은 동생의 유해만을 수습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주공이 허탈하게 웃으며 “내 진작 맏이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줄 알았다. 이는 맏이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돈을 아까워하며 차마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맏이는 어려서부터 늘 나와 함께 하면서 고생스럽던 때를 지켜보았고, 생활고를 겪었기 때문에 돈 쓰기를 어렵게 여긴다. 하지만 막내가 자랄 때는 내가 부유해진 이후였기 때문에 좋은 말과 마차를 타면서 토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러니 돈이 생기는 이치를 어찌 알겠는가? 따라서 돈 쓰기를 가볍게 여긴다. 그래서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 전에 내가 막내를 보내고자 했던 것은 막내가 돈을 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맏이가 돈을 쓸 줄 몰라 기어코 동생을 죽게 하였으니 이치가 그렇다고 해야 할 뿐, 슬퍼할 일이 못 된다. 나는 밤낮으로 둘째의 시신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俱, 見苦, 為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乘堅驅良逐狡兔, 豈知財所從來, 故輕棄之, 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 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事之理也, 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라고 하였다. <전문보기>
도주노도[陶朱老饕] 도주공의 노욕. 도주(陶朱)는 도주공(陶朱公)의 준말로, 춘추 시대 월(越) 나라 대부 범려(笵蠡)의 별칭이다. 월왕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巨金)을 벌어 번번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도주몽[刀州夢] 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집의 대들보 위에 칼 세 자루가 매달려 있는 데다 다시 칼 한 자루가 더 매달리는 꿈을 꾸고는 흉조(凶兆)라고 여기었다. 이의(李毅)가 이를 해몽하기를 “삼도(三刀)는 주(州) 자가 되고, 거기다 또 칼 한 자루가 더해졌으니, 당신께서는 익주(益州)를 맡게 될 것입니다.[三刀為州字, 又益一者, 明府其臨益州乎.]”라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왕준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다. <晉書 卷42 王濬列傳>
도주민[道州民] 도주(道州)의 백성들에 대해 읊은 시의 제목이다. 백장경집(白長慶集) 풍유(諷諭)에 보인다.
도주시구[道州詩句] 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양성(陽城)이 직간(直諫)을 했던 관계로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좌천되었을 적에 매우 선정을 베풀어 큰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백거이(白居易)가 도주민(道州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양성의 선정을 크게 격찬한 것을 가리킨다. <唐書 一百九十四>, <白樂天詩集 卷三>
도주요순[陶鑄堯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그분은 먼지와 때 그리고 쭉정이와 겨 같은 것을 가지고도 장차 요순을 빚어낼 수 있는 분인데, 뭣 때문에 외물을 일삼으려고 하겠는가.[是其塵垢粃糠 將猶陶鑄堯舜者也 孰肯以物爲事]”라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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