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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법[倒薤法], 도해불복[到海不復], 도해불유종[稻蟹不遺種], 도해십리[渡海十里]


도해양미[渡海糧米]  도해량(渡海糧)은 일본인 수부(水夫)에게 주는 식량이다. <通航一覽 卷122 韓錄> 도해량미의 양은 통문관지(通文館志) 권5 교린 연례송사에는 3섬 12말로 나온다.

도해법[倒薤法]  전서체(篆書體) 가운데 하나이다. 염교의 잎을 거꾸로 한 것[倒薤葉書]과 같은 글씨라는 뜻으로, 뛰어난 필체를 비유한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시 조장적(調張籍)에 “평생토록 천만 편 글을 지으니, 금해로 주옥같은 시구를 드리웠네.[平生千萬篇, 金薤垂琳琅.]”라고 하였다. <韓昌黎文集 卷5 調張籍>

도해불복[到海不復]  인생이 무상함을 슬퍼한 것이다.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천상에서 와서 힘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고대광실 명경 앞에서 백발을 슬퍼하나니 아침에 푸른 실이던 것이 저녁에 눈처럼 흰 것을.[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廻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朝如淸絲暮成雪]”이라 하였다. <李太白集 卷2>

도해불유종[稻蟹不遺種]  게가 벼를 깡그리 갉아먹어 곡식 종자가 남지 않음. 일설에는, 벼와 게 따위의 생선까지도 모두 씨가 마른 것이라고 한다. 국어(國語) 권21 월어 하(越語下)에 “지금 오(吳)나라에 게가 벼를 갉아먹는 재앙이 있어서 곡식 종자가 남지 않았다.[今其稻蟹不遺種.]”라고 보이는데, 주에 도해(稻蟹)에 대하여 ‘게가 벼를 갉아먹는 것이다.[蟹食稻.]’라고 하였다.

도해사[蹈海士]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한 선비로,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노중련이 일찍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천자(天子)가 되고 주제넘게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彼即肆然而為帝, 過而為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도해심[蹈海心]  어지러운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어 죽겠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빠져 죽겠다.”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도해십리[渡海十里]  구내공(寇萊公)은 송 나라 태종(太宗)·진종(眞宗) 때의 재상 구준(寇準)으로 내공(萊公)은 봉호(封號)이다. 그가 영남(嶺南)으로 사신 가는 사람을 전별한 시에 “바다를 건너는 것은 십 리인데, 산은 만 리나 지나리.[渡海只十里 過山應萬重]”라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경구(警句)라 하였다. 말년에 정위(丁謂)의 모함으로 해강(海康)이란 곳으로 귀양 갔는데, 그 경내에 이르러 뇌주(雷州)의 관리에서 바닷길의 원근(遠近)을 물으니 10리쯤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양살이의 조짐이 앞서 지은 전송시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였다. <宋詩紀事 卷4 寇準>

도해지[渡海枳]  남쪽에서 자라는 귤을 청수(淸水)와 회수(淮水)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남귤북지(南橘北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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