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사당[東萊祠堂] 송나라 때 성리학자 여조겸(呂祖謙)의 사당을 지칭한다. 동래는 그의 호로서, 주자(朱子)와 더불어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여 성리학자들의 추앙을 받았다. 명나라 경태(景泰) 5년(1454)에 산동성(山東省) 내주(萊州)에 동래서원(東萊書院)이 건립되었고, 만력(萬曆) 8년(1580)의 서원 철폐 명령으로, 여선생사(呂先生祠)로 개명하였다.
동래양녀[東萊兩女] 동래부(東萊府) 두 여인. 동래 왜관(倭館)에 잠입하여 왜인과 교간(交奸)한 두 여인을 말한다. 이들은 창기(倡妓)인데 처음에 전재(田才)에게 속임과 협박을 당해 왜관인줄 모르고 잘못 들어갔으나 그 뒤에는 알고도 재차 담장을 넘어가 왜인과 교간하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왜관 밖에서 효시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영조는 정유년과 병신년의 전례를 들어 살려 주려고 하였다.
동래양녀[東萊兩女] 1738년(영조14) 8월에 사비(私婢) 수례(守禮), 양녀(良女) 최애춘(崔愛春)이 전재(田才)의 주선으로 왜관(倭館)에 몰래 들어가 간음하였다가 발각되었는데 두 여인을 감률(減律)하여 도배(島配)하자 사헌부에서 두 여인을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논계하였다.
동래여공[東萊呂公]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을 가리킨다. 자는 백공(伯恭), 호는 동래, 하동(河東) 무주(婺州) 사람이다.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절친하여 그들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 일컬어졌으며, 주희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동래역설(東萊易說), 동래집(東萊集) 등이 있다.
동래여백공[東萊呂伯恭] 동래(東萊)는 남송의 성리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의 호이며, 백공(伯恭)은 그의 자이다. 금화(金華) 사람이다. 여호문(呂好文)의 손자로, 박학다식하며 주희(朱熹)나 장식(張栻) 등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주희와는 근사록(近思錄)을 함께 편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모시(毛詩)에 대해 논쟁하면서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배척하였다. 동래집(東萊集), 와유록(臥游錄), 서설(書說), 가숙독서기(家塾讀書記), 춘추집해(春秋集解), 좌씨박의(左氏博義) 등을 저술하였다.
동래여씨[東萊呂氏] 송(宋)나라 여조겸(呂祖謙)을 가리킨다. 자는 백공(伯恭), 호는 동래(東萊)이다. 주희(朱熹)·장식(張栻)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불리었고, 학설은 경사(經史)의 실용을 주장하고 성명설(性命說)에 얽매이지 않았다. 주희와 함께 북송 도학자의 어록을 편집하여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고주역(古周易), 춘추좌씨전설(春秋左氏傳說), 여씨가숙독지기(呂氏家塾讀持記), 역대제도상설(歷代制度詳說), 동래집(東萊集) 등이 있다.
동래여씨[東萊呂氏] 송(宋)나라 금화(金華) 출신이다. 대기(大器)의 아들로 이름은 조겸(祖謙)이고 자는 백공(伯恭)이며 호는 동래(東萊)이다. 시호는 성(成)으로 나중에 충량(忠亮)이라고 고쳤다. 상서우승(尙書右丞) 호문(好問)의 손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융흥(隆興) 때 진사가 되었다. 관직은 직비서각(直秘書閣) 저작랑(著作郞) 국사원편수(國史院編修)을 지냈다.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이라고 불렸다. 그의 문사(文詞)는 넓고 곧아 세상에 영향을 두루 미쳤다. 시서춘추(詩書春秋)에 대하여 많은 고의(古義)를 궁구했다. 또 칠십사(七十史)에 정통했다. 학자들은 동래선생(東萊先生)이라고 부른다. 주희(朱熹)와 육상산(陸象山) 두 사람이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그 뒤 주희(朱熹)와 함께 북송(北宋)도학자의 어록을 편집하여 근사록(近思錄)을 찬하였다. 저서에 고주역(古周易), 춘추좌씨전설(春秋左氏傳說), 동재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대사기(大事紀), 역대제도상설(歷代制度詳說), 소의외전(少儀外傳), 여씨가숙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 동래집(東萊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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