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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 동릉지폭[東陵之暴], 동릉후[東陵侯]


동릉소평포[東陵邵平圃]  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  도척(盜跖)이 동릉(東陵)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장자(莊子) 제29편 도척(盜跖)에 “도척이 한창 태산의 남쪽에서 졸개들을 쉬게 하고, 자신은 사람의 간을 회를 쳐 먹고 있었다.[盜跖乃發休卒徒於太山之陽, 膾人肝而餔之.]”라고 하였고, 또, 도척이 공자에게 “네 죄는 참으로 무겁다. 당장 돌아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간으로 점심반찬을 만들 것이다.[子之罪大極重, 疾走歸! 不然, 我將以子肝益晝餔之膳!]”라고 말하는 내용이 보인다.

동릉지수[東陵之壽]  동릉(東陵)은 동릉산에서 죽었다는 도척(盜蹠)을 가리킨다. 도척은 날마다 포악무도한 짓을 하고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는데, 끝내 천수를 다 누렸다고 한다.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백이는 명예를 위하여 수양산 밑에서 죽었고 도척은 이익을 위해서 동릉산(東陵山) 위에서 죽었다. 그 죽은 바의 까닭은 다르지만 목숨을 죽여 본성을 해친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백이는 옳다고 하고 도척은 그르다고 하는가.[伯夷死名於首陽之下 盜蹠死利於東陵之上 二人者 所死不同 其於殘生傷性均也 奚必伯夷之是而盜跖之非乎]”라고 하였다. 또, 소식(蘇軾)의 삼괴당명(三槐堂銘)에 “도척과 같은 흉악한 인간이 오래 살고 공자와 안회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재난을 당한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盜跖之壽, 孔顔之厄, 此皆天之未定者也.]”라고 하였고, 또 “선악의 응보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짐이 오래된 것이다.[善惡之報, 至於子孫, 則其定也久矣.]”라고 하였다.

동릉지폭[東陵之暴]  도척(盜跖)과 같이 난폭한 것을 말한다. 도척은 춘추 시대에 있었던 몹시 흉악한 사람으로,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하는데, 일찍이 동릉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동릉지폭[東陵之暴]  동릉(東陵)의 난폭함. 도척(盜跖)과 같이 난폭한 것을 말한다. 도척은 춘추 시대에 있었던 몹시 흉악한 사람으로,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하는데, 일찍이 동릉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동릉포옹[東陵抱甕]  남새밭을 힘들여 가꾼 농사꾼들을 말한다. 진(秦)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진 소평(邵平)이 진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살면서 장안성(長安城) 청문(靑門) 즉 동문(東門) 밖에서 외밭을 일구며 유유자적하게 은사(隱士)의 생활을 즐겼는데, 그의 외 맛이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동릉과(東陵瓜) 혹은 청문과(靑門瓜)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또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한음장인(漢陰丈人)이 남새밭을 가꿀 적에, 굴을 파고 우물로 들어가서 항아리를 안고 나와 물을 주곤 하였는데[鑿隧而入井 抱甕而出灌], 힘은 많이 들이면서도 효과는 적었다는 말이 나온다.

동릉후[東陵侯]  동릉후는 곧 진(秦)나라 소평(召平)의 봉호이다. 사기(史記) 권53 소상국세가 제23(蕭相國世家第二十三)에 “소평은 옛 진나라 동릉후이다. 진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로 가난하게 지내면서 장안성 동쪽에 오이를 심었는데, 오이 맛이 좋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동릉과라고 불렀다.[召平者, 故秦東陵侯, 秦破為布衣貧, 種瓜於長安城東, 瓜美, 故世俗謂之東陵瓜.]”라는 기록이 보인다. <史記 蕭相國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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