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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凍棃], 동리각건[東里角巾], 동리국[東籬菊], 동리비심[東里裨諶]


동리[東籬]  동리(東籬)는 동쪽 울타리란 뜻으로, 도잠(陶潛)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후세에는 흔히 국화 심은 곳이란 뜻으로 쓰인다.

동리[銅螭]  동으로 제작한 용 모양의 붓 접시이다.

동리[凍棃]  동리(凍棃)는 언 배를 말하는데, 나이가 들어 얼굴에 검버섯이 핀 노인의 피부를 비유한다.

동리[東里]  동리(東里)는 춘추 시대 정(鄭) 나라 대부(大夫) 자산(子産)이 살았던 지명으로 곧 자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자산은 동리자산(東里子産) 또는 정자산(鄭子産)이라고 불린다. 정자산은 수십 년 동안 국정을 잡고 있으면서 두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한 정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전혀 받지 않도록 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수식하고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潤色)한다.”라고 하였다.

동리각건[東里角巾]  진서(晉書) 권42 왕준열전(王濬列傳)에 “경은 전장에서 돌아온 뒤에 집에서 각건 차림을 한 채 오나라를 평정한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卿旋旆之日, 角巾私第, 口不言平吳之事.]”라고 하였다.

동리고사[東里故事]  이미 지은 글에 문채를 더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정나라에서 사명(辭命)을 만들 때면 네 사람이 합심하여 만드는데, 즉 비심(裨諶)은 초안(草案)을 하고, 세숙(世叔)은 그것을 토론(討論)하며, 행인(行人)인 자우(子羽)가 수정을 더하고, 동리 자산(東里子産)이 문채를 더했다고 한다.

동리구[東籬句]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느긋하게 남쪽 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 하여, 은자(隱者)의 한가한 정취를 묘사한 것이다.

동리국[東籬菊]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3>

동리비심[東里裨諶]  동리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 재상인 동리자산(東里子産)으로,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정자산은 수십 년 동안 국정을 잡고 있으면서 두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한 정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전혀 받지 않도록 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정나라의 대부였던 비심(裨諶)이라는 사람이 나라를 위한 계책을 잘 세웠는데, 들판에 나가서 생각하면 좋은 계책을 얻고 도시에서 생각하면 실패하였다. 그러자 정자산이 외국과의 문제가 있으면 그에게 수레를 타고 들판에 가서 가부를 결정짓게 하여, 어려운 외교 문제를 무난하게 처리하곤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수식하고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潤色)한다.[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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