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상조[同明相照] 대게 서로 비슷한 무리들이 한데 어울린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밝은 물건끼리는 서로 비추고, 같은 부류는 서로 구한다. 구름이 용을 따라 나타나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 붙듯 성인이 나타나면 만물이 뚜렷해진다.[同明相照, 同類相求.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睹.]”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명서명[東銘西銘] 송(宋)나라의 학자(學者)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지은 것으로, 자신의 서재(書齋) 동쪽과 서쪽의 창 아래에 걸어 놓았던 잠명(箴銘)이다. 원래는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원에 두 개의 창문을 동서로 내고 동쪽 창문에는 폄우(砭愚)라는 제목의 글을, 서쪽 창문에는 정완(訂頑)이란 글을 써서 걸었다가,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지적을 받아들여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으로 바꾸었다 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서명에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와 동류(同類)라고 한 내용이 있다.
동명성왕[東明聖王]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킨다.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를 건국한 시기는 기원전 37년으로 신라 혁거세 21년이었다.
동명신[東溟臣] 곤경에 처한 것을 구해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장주(莊周)가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는데 감하후가 봉읍(封邑)에서 나오는 세금을 받아서 빌려 드리겠다고 하므로, 장주가 말하기를 “제가 어제 오던 길에 길 가운데서 저를 부르는 자가 있어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묻기를 ‘붕어야! 그대는 왜 그러고 있는 건가?’라고 하자, 붕어가 대답하기를 ‘나는 동해의 파신입니다. 당신이 혹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나를 살려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좋다. 내가 장차 남쪽으로 가서 오왕과 월왕을 만나보고 서강의 물을 터놓아서 그대를 맞아 가게 하려는데, 그래도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붕어가 분개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내게 있어야 할 물을 잃어 내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말을 하니, 일찌감치 건어물 가게로 가서 나를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周昨來, 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中, 有鮒魚焉. 周問之曰: ‘鮒魚來! 子何爲者邪?’ 對曰: ‘我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 ‘諾. 我且南遊吳、越之王, 激西江之水而迎子, 可乎?’ 鮒魚忿然作色, 曰: ‘吾失我常與, 我無所處. 吾得斗升之水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外物>
동명왕[東明王]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로,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皺牟)이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로, 동부여(東扶餘)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의 모해를 피하여 졸본(卒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동명왕사[東明王祠] 현재의 평양 중구역에 있는 숭령전(崇靈殿)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을 모신 사당이다. 여기에는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이 함께 있는데, 단군이 서쪽에 있고 동명이 동쪽에 있다. 1429년(세종11)에 처음 설치했다. 그 곁에는 기자사(箕子祠)가 있다.
동명원[東明院]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에 있던 지명이다.
동명이인[同名異人]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 이름은 같으나 사람이 다름, 또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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