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봉[董奉] 삼국 시대에 동봉(董奉)이 여산(廬山)에 숨어 살면서 남의 병을 치료하여 주고는 돈은 받지 않고 살구나무를 심어 달라 하였는데 수년 만에 십만 주(十萬株)가 되었다.
동봉[東封] 옛날에 천하가 태평하면 황제가 동으로 태산(泰山)에 올라 제천(祭天)하는 행사. 동악(東岳)인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천지(天地)에 성공을 고하고 옥을 묻는데, 옥첩(玉牒)을 묻었는데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임종 직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에 의거해서 한 무제(漢武帝)가 동쪽 노나라 지역의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행했던 유명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봉(封)은 태산 위에 흙으로 단을 쌓고 하늘의 은공에 보답하는 제사를 말하고, 선(禪)은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의 땅을 깨끗이 쓸고 땅의 은덕에 보답하는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동봉[東封] 황제가 직접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의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임종(臨終) 직전에 봉선문(封禪文)을 지어서, 무제(武帝)에게 동쪽으로 가서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여 공업(功業)을 현창시키도록 청했으므로, 뒤에 무제가 그의 말대로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행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동봉매행[董奉賣杏] 동봉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여산(廬山)에 은거하면서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는 질병을 치료해 주고도 돈을 받지 않고 다만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원에 살구나무를 심게 하여 살구나무가 무려 10만 그루에 달했던바, 그는 또 그 행림(杏林) 속에 조그마한 창고 하나를 지어 놓고, 그 살구를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곡식 한 그릇을 그 창고에 갖다 두고 대신 살구 한 그릇을 가져가도록 하여 그것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神仙傳 董奉>
동봉문[東封文] 사마상여가 임종(臨終) 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무제(漢武帝)에게 동쪽으로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의 제사를 드리라고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봉서사[東封西祀] 동봉(東封)은 제왕이 순수(巡狩)하면서 동쪽 태산(泰山)에 올라 흙으로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는 봉선(封禪)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며, 서사(西祀)는 제왕이 순수하면서 서악(西嶽) 화산(華山)에 이르러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다.
동봉일니환[東封一泥丸] 동관한기(東觀漢記)에 “외효(隈囂)의 장수 왕원(王元)이 말하기를 ‘청컨대, 일환니(一丸泥)로써 대왕을 위하여 동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봉쇄하겠다.[元請以一丸泥, 爲大王, 東封凾谷關.]’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즉 험요(險要)한 지대는 지키기가 쉽다는 뜻이다.
동봉치우[董奉致雨] 동봉(董奉)은 삼국 시대 때 여산(廬山)에 숨어 살던 신선으로 남의 병을 치료하여 주고는 돈은 받지 않고, 흉년엔 많은 기민을 구휼하였다. 어느 해 크게 가뭄이 들자 여산 현령(縣令)이 고을의 선비들과 아전들을 시켜 동봉을 뵙고 비를 내리게 해주십사 청하였다. 그러자 동봉이 자신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가난한 집들의 지붕이 모두 뚫려 하늘이 보이는 판이니 어찌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겠는가?[貧道屋皆見天, 恐雨至何堪?]”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선비들과 아전들을 데리고 지붕을 만들고 거의 완성되어 진흙을 만들어 바를 무렵이 되자 “저녁에 비가 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날 밤에 비가 쏟아졌다. <江西通志>
동봉행림[董奉杏林] 동봉(董奉)이 머무는 행림이라는 뜻이다. 동봉의 고사에 유래하여, 후대에는 한의학을 흔히 행림(杏林)이라고 상징하게 되었다. 동봉(董奉)의 자(字)는 군이(君異)이고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후관(候官) 사람이다. 여산(廬山)에 살았는데, 도술(道術)을 행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질병을 치료하였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는 살구나무[杏] 다섯 그루를 심도록 하였으며, 질병이 가벼웠던 사람에게는 한 그루를 심도록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살구나무가 숲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숲을 대선행림(臺仙杏林)이라고 불렀다. 살구가 익으면 곡식으로 바꾸어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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