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동책[董策], 동처구지[動處求之], 동천[東遷], 동천[洞天], 동천[僮千]


동채[童蔡]  남송 말기의 간사한 재상으로 악명이 있었던 동관(童貫)과 채경(蔡京)을 합칭한 말이다.

동책[董策]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대책(對策)을 말한다. 무제(武帝) 때에 누차 대책을 올려 무제의 중망(重望)을 입은 일이 있다. 동중서는 무제(武帝) 때에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설(說)을 요지로 삼아 무릇 대책(對策)을 세 번 올렸던바, 모두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동중서가 세 번 올린 대책은 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 칭하기도 한다.

동처구지[動處求之]  동하는 곳에서 구한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권3 여장흠부별지(與張欽夫別紙)에 “맹자(孟子)의 존망출입(存亡出入)의 설은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잡아 보전하게 하려는 것뿐이니, 이 마음을 알고서 한 말은 아닌 듯합니다. 만약 항상 잡아 보전한다면 이른바 경(敬)이라는 것은 순수하며, 순수하면 동정(動靜)이 한결같아 이 마음이 보전되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드시, ‘동하는 곳에서 구한다.’라고 한다면, 이는 정(靜)으로 치우침을 면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동(動)으로 기운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잡아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안자의 경지 이상에 오른 사람이라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存亡出入之說 亦欲學者操而存之耳 似不爲識此心發也 若能常操而存 卽所謂敬者純矣 純則動靜如一 而此心無時不存矣 今也必曰動處求之 則是有意求免乎靜之一偏 而不知其反倚乎動之一偏也 然能常操而存者 亦是顔子地位以上人 方可言此]”라고 하였다.

동천[東遷]  동천(東遷)은 주(周)나라의 유왕(幽王)이 호경(鎬京)에서 부도덕(不道德)한 일을 자행하다가 서융(西戎)에게 시해당하고 아들 의구(宜臼)가 즉위하여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천도(遷都)한 일을 가리킨다. 의구(宜臼)는 시호가 평왕(平王)인데, 주(周)나라는 이때부터 국력(國力)이 쇠약해져 이름만 천자국(天子國)이어서 제후들이 조회 오지 않았다.

동천[東遷]  동천은 곧 주 유왕(周幽王)이 무도하여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자 그의 아들인 평왕(平王)이 견융을 피하여 호경(鎬京)에서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가리키는데, 공자는 특히 노(魯)나라 역사인 춘추(春秋)를 저술하면서 평왕이 동천한 지 40여 년 뒤인 노 은공(魯隱公) 원년으로부터 애공(哀公) 14년에 이르기까지 242년간의 일을 기술하여 천추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징계하였다.

동천[東遷]  동천은 평왕(平王)이 견융(犬戎)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을 말한다. 이후를 동주(東周) 혹은 성주(成周)라고 하며, 이를 기점으로 춘추 시대(春秋時代)가 전개되다가, 위열왕(威烈王) 23년에 한(韓), 위(魏), 조(趙)를 제후로 임명하면서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돌입한다.

동천[東遷]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무도하여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자, 진(晉)나라 문후(文侯)와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태자 의구(宜臼)를 맞아 평왕(平王)으로 세우고는, 서쪽 호경(鎬京)으로부터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고 이후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이 일을 동철(東轍) 혹은 동천(東遷)이라고 한다.

동천[洞天]  도가(道家) 용어로, 골짜기 속에 따로 천지가 있다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인간 세상에는 36개의 동천이 있다고 한다. <述異記 卷下> 주로 골짜기의 미칭으로 사용된다.

동천[洞天]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동부(洞府)로 신선이 사는 곳을 이른다. 대천(大天) 안에 36소(所)의 동부가 있으니 제일 왕옥산(第一王屋山)의 동부의 이름은 소유청허지천(小有淸虛之天)이라고 한다. 술이기(述異記)에 “인간의 36동천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10개이고 그 나머지 26개는 구미지(九微誌)에 나오기는 하나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동천[東川]  지명. 당조십도(唐朝十道) 중 하나인 검남도(劍南道: 성도부成都府 관할)를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둘로 나눠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와 검남동천절도사(劍南東川節度使)를 두었다.

동천[東川]  지명.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757)에 검남(劍南)을 동천(東川)과 서천(西川)으로 나누어 각각에 절도사를 두었는데,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는 사천분지(四川盆地) 중부를 관할하였다.

동천[僮千]  만석군의 집에 동복(僮僕)이 천여 명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