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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준과[登俊科], 등준시[登俊試], 등즐[鄧隲], 등즐안장[鄧騭安葬]


등준[登俊]  세조 때에 임시로 보인 과거로,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에게 보인 것이다.

등준과[登俊科]  1466 세조 12년 7월, 특별히 경재(卿宰)이하의 문·무관과 종친(宗親)을 시험한 임시 과거. 이는 종친을 등용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 후 1487 성종 18년에는 종친과(宗親科)라 하여 종친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를 실시한 바 있다. 등준시(等俊試).

등준시[登俊試]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에게 특별히 보이던 과거. 등준시(登俊試)는 세조(世祖) 때 특별히 재상(宰相)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기 위하여 설치한 과거로 등준과(登俊科)를 말한다.

등준시[登俊試]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에게 보였던 제술(製述) 시험이다. 1466년(세조12) 7월 23일에 세조가 사덕(四德)·사단(四端)의 학설(學說)로 친히 책제(策題)를 짓고는 종신(宗臣)과 재추(宰樞) 문신에게 제술하게 하고 이튿날 그중 판중추부사 김수온(金守溫) 등 12명을 뽑았는데, 이를 등준시라고 명명하였다. <世祖實錄>

등준시[登俊試]  현직 관리, 종친, 부마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시 과거시험이다.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7월에 종친(宗親)과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文官)으로서 자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등즐[鄧騭]  후한(後漢)의 안제(安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인 등후(鄧后)가 수렴청정하고 그 오빠 등즐이 대장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 변방에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여 국방에 국력이 낭비되자 등즐은 양주(凉州)를 포기하고자 하였는데, 낭중(郞中) 우후(虞詡)와 중신들이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우후를 미워한 등즐은 비적(匪賊)에게 살해된 조가현(朝歌縣)의 현령 자리에 우후를 앉혀 비적을 토벌토록 명하였다. 그런데 조가현에 도착한 우후는 장사(壯士)를 모으고 기발한 계책을 써서 비적을 토벌하였다. <後漢書 卷58 虞詡列傳>

등즐[鄧隲]  등즐(鄧隲)은 후한 화제(後漢和帝)의 비(妃)인 등 황후(鄧皇后)의 오빠이다. 등즐은 안제(安帝)를 세우고 서강(西羌)을 평정하였으며, 보정(輔政)이 되어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부역을 줄이며 현사(賢士)들을 추천하여 천하가 안정되었다. <後漢書 卷46>

등즐안장[鄧騭安葬]  등 태후(鄧太后)가 죽은 뒤에 왕성(王聖)의 무고로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는데, 이때 등즐(鄧騭)도 봉작이 깎이고 아들 등봉(鄧鳳)과 함께 단식하다가 끝내 죽었다. 이에 대사농(大司農) 주총(朱寵)이 죄 없이 화를 당한 등즐을 원통하게 여겨 “마땅히 주검을 거두어 총차(冢次)에 안장(安葬)해야 한다.”라고 상소를 올렸는데, 마침내 안제(安帝)가 깨닫고 낙양(洛陽) 북망(北芒)의 구영(舊塋)에 다시 장사 지내 주었다. <後漢書 卷16 鄧寇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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