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신념이 일을 이루고, 천도는 되돌려주기를 좋아한다[人無志而不立] <圍爐夜話위로야화>


오자서가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도가 멸망하였고

신포서가 군주의 환란을 구하고자 하여

초나라가 보존되었으니

사람의 의지란 믿을만함을 알 수 있고

진시황이 동주를 멸망시킨 해에 유방이 태어났고

양무제가 남제를 멸망시킨 해에 후경이 태어났으니

하늘의 도는 되돌려주기를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伍子胥報父兄之仇,  而郢都滅,
오자서보부형지구,  이영도멸,
申包胥救君上之難,  而楚國存,  可知人心足恃也.
신포서구군상지난,  이초국존,  가지인심족시야.
秦始皇滅東周之歲,  而劉季生,
진시황멸동주지세,  이유계생,
梁武帝滅南齊之年,  而侯景降,  可知天道好還也.
양무제멸남제지년,  이후경강,  가지천도호환야.

<圍爐夜話위로야화>


  • 오자서[伍子胥]  이름은 원(員)이고, 자서(子胥)는 자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정치가로 원래 초(楚)나라 사람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인데, 초 평왕(楚平王)이 아버지 오사와 형인 오상(伍尙)을 죽이자 오(吳)나라로 망명하였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중용(重用)되어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합려(闔廬)를 도와 오군(吳軍)을 거느리고 초(楚)나라의 도읍 영(郢)으로 쳐들어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죽고 합려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차(夫差)를 도와 월(越)나라를 정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월왕 구천(句踐)이 강화를 요청하자 오자서는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권했으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강화를 허락하고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려하였다. 오자서는 이에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부차는 간신인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고 그를 신임하였다. 오자서가 부차에게 누차 간언하였지만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촉루(屬鏤)라는 검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그러자 오자서가 백비의 참언을 듣는 부차를 원망하면서 사인(舍人)에게 당부하기를 “반드시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서 오왕의 관을 짜도록 하라. 그리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도성의 동문 위에 걸어 두어라.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오나라를 멸하는 것을 똑똑히 보려 한다.[必樹吾墓上以梓, 令可以為器. 而抉吾眼縣吳東門之上, 以觀越寇之入滅吳也.]”라고 하고는 자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왕이 대단히 노여워하면서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인 치이(鴟夷)에 담아서 강물에 띄워 버리게 하였다. 후에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강가에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지내고 인하여 그 산을 서산(胥山)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부차는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미녀들과 놀다가 끝내 월나라에게 패망하였고, 부차는 월나라 지역인 용동(甬東)에 잡혀가 있다가 끝내 월왕(越王) 구천(句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史記 卷六十六>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 오자서[伍子胥]  오원(伍員)으로, 자서(子胥)는 그의 자(字)이다. 선조 오거(伍擧)가 직간(直諫)으로 초 장왕(楚莊王)을 섬겨 현달한 이후 자손 대대로 초(楚)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부친은 초나라 대부 오사(伍奢)로, 평왕(平王) 때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초 평왕(楚平王)이 태자를 장가들이기 위해 소부(少傅)인 비무기(費無忌)를 진(秦)나라에 보냈는데, 신부가 절색(絶色)인 것을 본 비무기가 평왕을 충동질하여 며느리 삼으려던 여자를 대신 차지하게 하였다. 비무기는 이 일로 평왕의 사후에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에게 태자를 이간질하여 변방으로 내보내도록 하고, 또 태자가 변방에서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이간질하였다. 오사는 이에 대해 “왕께서는 어찌 참소하는 하찮은 소신(小臣) 때문에 골육을 멀리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무기가 “왕께서 지금 제압하지 않으시면 나중에는 왕께서 사로잡힐 것입니다.”라고 하자, 평왕이 노하여 오사를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태자를 살해하게 하였는데, 태자는 누군가 미리 알려 주는 말을 듣고 송(宋)나라로 망명하였다. 비무기는 오사의 두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뒷날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아비를 볼모로 해서 두 아들을 불러들이기를 권하였다. 평왕이 사람을 보내 “너희가 오면 너의 아비를 살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니,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였는데, 오자서가 만류하기를 “평왕이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살려 주려는 것이 아니고, 후환이 두려워서 아버지를 볼모로 삼고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면 아버지와 함께 다 죽일 것이니, 아버지를 살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른 나라로 달아나서 뒤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오상은 “나도 가면 다 죽을 것임을 알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살려고 하는데 가지 않았다가 뒤에 복수도 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라고 하면서 “너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니 달아나라. 나는 가서 죽겠다.”라 하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활을 겨누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가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오사는 “초나라 군신들은 장차 전쟁에 시달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오상이 가자 평왕은 예상대로 오사와 오상을 모두 죽였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闔閭)를 섬겨 수차례 초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초나라의 수도 영(郢)에 쳐들어가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국외로 달아나게 만들었으며, 평왕의 무덤을 파 시체를 꺼내어 300차례 채찍질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갚았다. 그 뒤 합려의 뒤를 이어 부차(夫差)가 즉위하여 회계(會稽)에서 월(越)나라 군대를 대파(大破)하였다. 월왕 구천(句踐)이 강화를 요청하자 오자서는 후환을 남기지 말고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며 이에 반대하였으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을 받아들인 일로 인해 오자서는 부차와 사이가 소원해졌다. 거기에 오나라의 태재(太宰) 비(嚭)가 월나라의 뇌물을 받아먹고 오자서를 참소하자, 부차가 오자서에게 검을 하사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이에 오자서는 그의 사인(舍人)에게 “나의 눈알을 빼어서 오나라의 동문(東門)에 걸어 놓아 월나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라.”고 하고는 부차가 내린 촉루검(屬鏤劍)으로 자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왕은 노하여서 오자서의 시신을 말가죽 부대에 담아서 오강(吳江)에 던져 버렸다. 그 뒤 9년 후에 과연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 영도[郢都]  초(楚)나라의 도읍. 지금의 호북성 강릉이다. 초 평왕(楚平王) 때의 초(楚)나라의 도성이다.
  • 신포서[申包胥]  신포서(申包胥)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이 공손(公孫)이었는데 신(申) 땅에 봉작(封爵)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하였다. 호북(湖北) 형주(荊州) 감리(監利) 사람이다. 왕손(王孫)이라 왕손포서(王孫包胥)라고도 불렀다. 오자서(伍子胥)와 더불어 친하게 지내었는데, 오자서가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와 형인 오상(伍尙)이 초 평왕(楚平王)에게 죽임을 당하자, 오(吳)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반드시 초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我必覆楚.]”라고 하자, 신포서가 “그대가 초나라를 전복시키려한다면 나는 반드시 존속시킬 것이다.[我必存之.]”라고 하였다. 그 후에 오자서가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함께 오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을 공격하자 초소왕(楚昭王)은 성을 빠져나가 수(隨)로 도망쳤다. 산으로 피한 신포서는 사람을 보내 죽은 초평왕(楚平王)을 무덤에서 꺼내 채찍질을 한 오자서의 행위를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그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고 꾸짖고, 진(秦)나라로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진나라가 구원을 허락하지 않자, 신포서는 대궐 뜰의 담장[庭牆]에 기대어 밤낮으로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이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 군신들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진애공(秦哀公)이 친히 무의(無衣)라는 시를 짓고 전차 5백 대를 내주며 대부 자만(子滿)과 자호(子虎)로 하여금 초나라를 돕게 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 군대에 협공을 당한 오자서가 퇴각한 뒤, 도성으로 돌아온 초소왕(楚昭王)이 신포서에게 상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신포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가솔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때의 일로 곡진정(哭秦庭)이라는 별칭을 얻은 신포서는 이후 충현(忠賢)의 전범이 되었다. <淮南子 卷19 修務訓> <春秋左氏傳 定公4年>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 진시황[秦始皇]  시황제(始皇帝)라고도 하는데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로 성은 영(嬴)이고 이름은 정(政)이다. 법가사상가인 이사(李斯) 등을 중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일컫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성(城)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사기(史記) 진시황기(秦始皇紀)에서 “26년 진(秦)나라가 막 천하를 통일하자 시법(諡法)을 없애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는데, 도로를 만들고 장성(長城)을 쌓고 아방궁(阿房宮)을 만들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였으며,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불태우고 유생(儒生)들을 땅에 묻었다. 37년 7월에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붕어(崩御)하였다.”라 하였다.
  • 유계[劉季]  유계(劉季)의 계(季)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자이다.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는 사상정장(泗上亭長)이었는데 정장(亭長)의 신분으로, 장차 장인이 될 여공(呂公)을 처음 만날 적에, 돈이 없으면서도 만전(萬錢)의 축하금을 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는 들어가서 상좌(上座)에 앉았는데, 그때 패현(沛縣)의 관리였던 소하(蕭何)가 “유계는 본시 큰소리만 많이 칠 뿐 약속을 지키는 일이 거의 없다.[劉季固多大言, 少成事.]”라고 빈정거린 기록이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온다.
  • 한고조[漢高祖]  서한(西漢)의 시조 유방(劉邦). 성(姓)은 유(劉)이고 이름은 방(邦)이며, 자는 계(季)이다.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교유하였다. 진(秦)나라 말기에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였는데 이 때 유방도 지역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서 기병하여 진나라 타도에 참가하였다. 진나라 멸망 후 그는 4년간에 걸친 항우(項羽)와의 쟁패전에서, 소하(蕭何)・조참(曹參)・장량(張良)・한신(韓信) 등의 도움으로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B.C. 202년 황제가 되어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결정하였다.
  • 양무제[梁武帝]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이름은 소연(蕭衍),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소연(蕭衍)은 원래 남제(南齊)의 대신(大臣)으로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다. 폭정을 일삼던 황제 동혼후(東昏侯)를 타도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도읍인 건강(建康)을 함락시키고, 제주(齊主)를 폐하고 남강왕(南康王) 소보융(蕭寶融)을 받들어 제(帝)로 삼고 자신은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정권을 전담하였으며, 중흥(中興) 2년(502)에 화제(和帝) 소보융(蕭寶融)을 폐하고 제(帝)라 칭하며 양(梁)나라를 세웠다. 즉위 초에는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등 괄목할 만한 정치를 폈으나, 말년에 불교를 좋아하여 불경에 통달하고 많은 절을 세웠으며, 육식을 금하고 국가의 제사나 잔치에 어떤 생명이든 죽이지 않도록 칙령을 내렸다.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나라가 쇠퇴하였다. 548년 동위(東魏)에서 투항해 왔던 적신(賊臣) 후경(侯景)이 난(亂)을 일으켜 이듬해 수도 건강(建康)이 함락되고, 강압으로 유폐되어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화병으로 정거전(淨居殿)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유학을 중시하고 문학·악률·서법에 뛰어났다. 저술이 많았으나 모두 유실되었고, 명(明)나라 때 집일된 양무제어제집(梁武帝御制集)이 있다.
  • 양무제 소연[梁武帝 蕭衍]  남북조시대 때 양(梁)나라 창건 황제로 호불(好佛) 군주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성은 소(蕭), 이름은 연(衍)이다. 자는 숙달(叔達)이고 소자(小字)는 연아(練兒)이며 남난릉군(南蘭陵郡) 무진현(武進縣: 현재의 강소江蘇 단양丹陽 방선진訪仙鎭) 사람으로 한(漢)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소하(蕭何)의 25세손이다. 박학하고 문무에 재질이 있었다. 제(齊)나라에서 벼슬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양양(襄陽)을 지켰다. 남제(南齊)의 경릉왕(竟陵王) 왕자량(王子良)의 집에서 심약(沈約)과 범운(范雲) 등 문인 귀족과 교유하여 팔우(八友)의 이름을 얻었다. 제나라 영원(永元) 황실이 어지러워지자 동혼후(東昏侯)에 대한 타도군을 일으켜 도읍 건강(建康)을 함락시킨 뒤 남제를 멸망시키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이어 제(齊)나라 화제(和帝)를 폐위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유학(儒學)을 중흥시키고 백가보(百家譜)를 개정하면서 방목(謗木)을 설치하고 공헌(貢獻)을 폐지하는 등 괄목할 만한 정치를 펼쳤다. 나중에는 사족(士族)을 중용하고 불교를 신봉하여 사원을 대대적으로 건축하는 한편 세 번이나 동태사(同泰寺)에 몸을 바쳤다. 치세는 50년에 이르는데, 전반은 정치에 정진했지만 후반에는 불교신앙이 정치면에도 나타나면서 불교사상사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지만 조금씩 파국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대동(中大同) 동위(東魏)의 반장(叛將) 후경(侯景)이 투항했는데, 얼마 뒤 동위와 화친을 구하자 이를 의심한 후경이 이듬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이 함락되고, 자신은 굶주림과 곤궁 속에 병사하였다. 문학에 뛰어났고 음률(音律)에도 밝았으며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주역강소(周易講疏)를 비롯하여 주역대의(周易大義), 계사의소(繫辭義疏), 육십사괘이계문언서괘등의(六十四卦二繫文言序卦等義), 모시대의(毛詩大義), 모시발제서의(毛詩發題序義), 모시춘추문답(毛詩春秋問答), 상서대의(尙書大義), 중용강소(中庸講疏), 예기대의(禮記大義), 효경강소(孝經講疏), 효경의소(孝經義疏), 공자정언(孔子正言), 낙사의(樂社義) 등이 있었지만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명나라 때 편집된 양무제어제집(梁武帝御製集)이 있을 뿐이다. 남조 여러 황제 중 재위기간(502~549)이 가장 길었다.
  • 후경[侯景]  자는 만경(萬景)이며 지금의 내몽고 고양현(固陽縣) 남쪽에 있던 북위(北魏: 후위後魏) 회삭진(懷朔鎭) 사람이다. 갈족(羯族)이다. 힘이 장사였으며 기사(騎射)에 능하였다. 북진(北鎭)의 수병(戍兵)으로 변장(邊將)인 권신(權臣) 이주영(爾朱榮)을 섬겨 군공(軍功)으로 정주자사(定州刺史)가 되었다. 재상 고환(高歡)이 학정을 일삼던 이주씨(爾朱氏)를 몰살하고 절민제(節閔帝)를 폐한 뒤 효무제(孝武帝)를 옹립하였다가 효무제가 고환을 토벌하려다 실패하고 서쪽 장안(長安)으로 달아나자 534년에 다시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고 동위(東魏) 시대를 열었는데, 후경은 이러한 고환에게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얼마 뒤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동위하남도대행대(東魏河南道大行臺)가 되어 하남 지방을 장악했다. 후원자인 고환이 죽은 뒤 고환의 장자인 고징(高澄)과 불화하여 태청(太淸) 1년에 양 무제(梁武帝)에게 내부(來附)하자, 양무제가 후경을 받아들여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였다. 태청(太淸) 2년(548)에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업(建業: 건강建康)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대성(臺城)을 함락시키고 양 무제(梁武帝)를 유폐시켜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어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했다가 얼마 뒤 폐위시키고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옹립하였다. 대보(大寶) 2년(551) 간문제를 죽이고 소동을 폐위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연호를 태시(太始)라고 하였다. 나중에 왕승변(王僧辯) 등의 공격을 받아 도주하다가 피살되었다. <梁書 卷56 侯景列傳> <資治通鑑>
  • 호환[好還]  본래의 상태로 돌리기를 좋아함. 호환(好還)은 잘 돌려준다는 뜻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같은 말로, 선(善)은 선(善)으로, 악(惡)은 악으로 갚는다는 뜻이다. 즉, 보응(報應)이 어긋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회암집(晦菴集) 권37 답정경망(答鄭景望)에 주희(朱熹)가 “범 충선은 제공이 반이의 격언을 소홀히 여기고 호환의 경계를 위배하여 화를 자초하였다고까지 논하였는데, 이는 더욱 정대한 도리가 못 된다.[至其論諸公忽反爾之言 違好還之戒 自取禍敗 尤非正理]”라고 한데서 보이는데, 반이(反爾)는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出乎爾者 反乎爾者]”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또,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30장에 “도(道)로써 임금을 보좌하는 자는 군사로써 천하를 강성하게 하지 않으니, 그 일(재앙)이 곧잘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군사들이 있었던 곳에서는 가시나무가 생겨나고, 대군이 지나가고 난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게 된다.[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兵之後, 必有凶年.]”라고 하였는데, 그 일이란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정복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여러 가지 모양의 재앙이 곧바로 뒤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譯文】 人心足恃,  天道好還 .[事在人為,  天道輪迴.] 春秋時的伍子胥,  爲了報父兄之仇,  誓言滅楚, 終於破了楚的首都郢,  鞭仇人之屍.  而當時的申包胥則發誓保全楚國,  終於獲得秦軍救援,  使楚國不致滅亡.  由此可見,  人只要決心去做,  一定能辦得到.  秦始皇滅東周那一年,  滅秦立漢的劉邦也出生了,  梁武帝滅南齊的那一年,  侯景前來歸降.  可見天理循環,  報應不爽.
[春秋時代伍子胥的父兄被楚平王所殺,  伍子為報父兄之仇,  投奔吳國,  帶兵攻破了楚都城郢,  而楚國的大臣申包胥則發誓要救楚國的危難,  向秦國哭來了救兵,  終於保全了楚國不被消滅.  由此可見,  一個人如果決心很大,  什麽事都有可能辦到.  在秦始皇滅掉東周的那一年,  劉邦也出生了,  而後來正是劉邦推翻秦朝建立漢朝  ;  在梁武帝滅掉南齊的那一年,  侯景前來歸降,  而後來也正是侯景反叛了梁武帝.  似乎可以看到沒有永恆的成功和失敗,  人世間似乎也有生和滅的規律可循.]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