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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명주[馬援明珠], 마원문서[馬援文犀], 마원병졸[馬援病卒], 마원불여[馬援不與]


마원명주[馬援明珠]  마원(馬援)이 교지(交阯)에 있을 적에 항상 율무[薏苡]를 먹으면서 장기(瘴氣)를 극복하였는데, 교지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율무를 한 수레 싣고 왔다. 당시 사람들은 남방의 진기한 물건을 싣고 온 것으로 여겼으나 마원이 그때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원이 죽은 뒤 어떤 자가 상소해 전에 싣고 온 것이 모두 명주(明珠)와 문서(文犀)라고 참소하니, 광무제가 이 말에 속아 크게 노하였다. 이에 마원의 가족들은 두려워 예(禮)를 갖추지 못하고 초초(草草)히 장사 지내고 말았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원모서정릉만[馬援冒暑征陵蠻]  마원(馬援)이 무더위를 무릅쓰고 능만(陵蠻)을 원정함. 마원(馬援)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와 농서태수(隴西太守)를 지냈으며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되어 교지(交趾) 지방에서 봉기한 징측(徵側)·징이(徵貳) 자매의 반란을 토벌하고, 하노이 부근의 낭박(浪泊)까지 진출하여 남방을 평정한 공로로 43년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으며, 북방의 흉노(匈奴)와 오환(烏丸)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능만(陵蠻)을 토벌하러 출정하였다가 험로에 막혀 진격하지 못하고, 열병 환자가 속출하여 고전하다가 많은 병사를 잃고 자신도 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 <後漢書 권24 馬援列傳>

마원문서[馬援文犀]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서역의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하고서 율무를 종자로 삼으려고 수레 가득 싣고 돌아왔는데, 그가 죽은 뒤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명주(明珠)와 무늬가 있는 무소뿔[文犀]을 수레에 가득 싣고 왔다.’고 모함하자, 광무제(光武帝)가 이 말에 속아 크게 노하였다. 이에 마원의 가족들은 두려워서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채 마원을 장사 지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원병졸[馬援病卒]  마원(馬援)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수로 A.D. 47년, 남방의 무릉만(武陵蠻)을 토벌하러 출정하였다. 마원(馬援)의 정벌군이 무릉(武陵)의 오계(五溪)로 진군할 때에 적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호두(壺頭)와 충도(充道)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호두(壺頭)로 가면 노정(路程)은 가까우나 물길이 험하였고 충도(充道)로 가면 길은 평탄하나 운량로(運糧路)가 멀었다. 이에 마원(馬援)은 빨리 진격하기 위하여 호두(壺頭)로 진출하였으나 적들이 높은 곳에 올라 좁은 통로를 막아 한군(漢軍)의 전진을 방해하였으며, 물살이 급하여 배가 올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무더위가 극심하여 장병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가 많았고 마원(馬援) 또한 병사하였다. <後漢書 권24 馬援列傳>

마원불여[馬援不與]  마원(馬援)은 한 명제(漢明帝)의 장인이다. 한 명제(漢明帝)가 중흥 공신(中興功臣)을 사모하여 등우(鄧禹)·마성(馬成) 등 28인의 초상을 남궁(南宮)에 있는 운대(雲臺)에 그릴 적에 역시 중흥 공신 마원은 황후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後漢書 馬援列傳> <資治通鑑 卷44>

마원부주객[馬援不住客]  후한 때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은 본디 공손술(公孫述)과 동향(同鄕) 사람이었는데, 마원이 처음에 외효(隗囂) 밑에 있으면서 그의 명에 따라 당시 촉(蜀)에서 칭제(稱帝)하고 있던 공손술에게 사신으로 갔다. 그러자 공손술은 마원을 친구로서 대하지 않고 신하로서 대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휘하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면서 얕보고는 공손술을 버리고 광무제를 섬겨 큰 공을 세웠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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