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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신하에게 굽혀 천하를 제패한다[一臣屈而勝天下일신굴이승천하] <戰國策전국책>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백성을 쉬게 하고 무기를 만들어 정비하자, 또다시 조(趙)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무안군(武安君)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왕이 말하였다.

“지난해 국고는 텅텅 비고 백성은 굶주리고 있는데도 그대는 백성의 힘도 헤아리지 않고 병량을 늘여 조나라를 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지금 나는 백성을 쉬게 하여 전사를 기르고 양식을 쌓아 삼군의 급여는 이전에 비하면 두 배가 된다. 그런데도 안 된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무안군이 말하였다.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진군(秦軍)은 대승하고 조군(趙軍)은 대패하여, 진나라는 환희하고 조나라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백성은 죽은 자는 예를 다하여 장사 지내고, 상처를 입은 자는 정성을 다하여 돌봐주고, 지쳐 있는 자는 서로 향응하고 음식물을 보내주느라 그 재산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나라 백성은 죽은 자는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자는 치료해 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슬퍼하고, 힘을 합하여 걱정을 같이 하고, 전답을 경작하는 데도 촌가를 아껴서 그 재산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전보다 두 배가 되는 군세를 파견하여도, 소신이 예측컨대, 조나라의 수비도 십 배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조나라에서는 장평의 싸움이 있은 후 신하들은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일찍 출사하여 늦게 퇴출하고, 말씨도 공손히 하고, 예물도 정중하게 하여 사방으로 사자를 보내어 연・위와 친교를 맺고, 제・초와 친분을 맺고, 노심초사하여 진나라에 대비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라는 안으로는 충실하고 밖으로는 교분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직 조나라를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왕이 말하였다.

“나는 이미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오교대부(五校大夫)인 왕릉(王陵)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하지만 왕릉은 전투에 패하여 다섯 부대를 잃었다. 이렇게 되자 소왕은 무안군을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무안군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응후(應侯)로 하여금 무안군을 만나게 하여 책망하면서 말하였다.

“초(楚)나라의 왕은 사방 5천리, 무기를 가진 전사는 백만, 그런데 당신은 전에는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들어가 언영(鄢郢)을 함락하고, 그 종묘를 불사르고, 동쪽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초나라 사람들은 벌벌 떨고 동쪽으로 옮기고서 다시는 서쪽으로 향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서로 호응하여 많은 군세를 동원하여 헤아릴 수 없었고, 당신이 이끄는 병졸은 그 절반에도 미달했지만, 이궐(伊闕)에서 싸워 크게 양국의 군을 파하여 유혈은 방패를 떠돌게 하고[流血漂鹵유혈표로], 수급을 베기를 24만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진(秦)나라의 동번(東藩)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당신의 공이다.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장평에서 죽은 조나라의 병졸이 이미 10중 7, 8에 이르고, 나라는 곤궁하여 나약하다. 그래서 나는 크게 조나라의 군세의 수배나 되는 군사를 동원하였다. 원컨대 당신을 장군으로 하여 꼭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싶다. 귀군은 지금까지 소수로써 다수를 이기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 신과 같았다[取勝如神취승여신]. 더욱이 지금은 강으로써 약을 치고[以彊擊弱이강격약], 중으로써 과를 치는 것이다[以衆擊寡이중격과].”

그러나 무안군은 말하였다.

“그 때 초왕(楚王)은 국토의 크기를 믿어 정사를 걱정하지 않고, 신하들은 서로 공로를 시기하고, 주군에게 아첨하는 무리가 정무를 맡고 양신(良臣)은 배척되었기 때문에 인민의 마음은 이반하고, 성의 경비도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양신이 없기 때문에 수비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가 군사를 이끌고 깊이 침입하여 수많은 성읍을 탈취하고, 다리를 부수고 배를 불살라 병졸에게 결사 감투의 결심을 굳히게 하고, 교야(郊野)의 전답을 약탈하여 병량을 보충하게 한 이유입니다. 이 때 진나라의 사졸은 군을 집으로 삼고, 장사를 부모로 삼아 서로 의존하지 않았는데도 친분이 두터웠고, 수단을 쓰지 않았는데도 서로 믿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공을 함께 나누고, 죽어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인은 자기 고장에서 싸우는 것이므로 자연히 자기 집을 걱정하고 아무도 투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공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궐(伊闕)의 싸움에서는, 한나라는 고립하여 위나라를 돌아보면서 자기 군사를 먼저 쓰려고 하지 않았으며, 위나라는 한나라의 정예를 믿고 선봉에 내세우려고 하여 양군이 서로 이용하려고 다투느라 손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소신에게 의병(疑兵)을 내세워 한나라 군진에 대치케 하고 군을 하나로 정리하여 정병을 모으고 위나라의 불의를 찌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위군이 패했다는 것을 알고 한군은 자연히 무너지고, 우리는 승리에 편승하여 도망치는 것을 쫓았습니다. 그래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형세를 보아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승리는 자연의 도리입니다. 무엇이 신(神)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진(秦)나라는 조군(趙軍)을 장평(長平)에서 파하면서 시리를 타고 그 공황을 틈타 멸망시키지 않고, 습복했다고 해서 조나라를 용서함으로써 조나라가 경작하여 축적을 늘이고, 고아를 양육하고, 어린 아이들을 키워서 무리를 늘리고, 무기와 갑주를 만들어 정비하여 힘을 더하고, 성곽을 높이고 호를 파서 그 굳힘을 엄하게 할 여유를 주었습니다. 조나라에서는 주군은 체면을 내던지고 신하로 낮추고 신하는 몸을 돌보지 않고 결사의 용사가 되고, 평원군(平原君)의 일족에 이르러서는 모두 처첩을 보내어 병졸들 사이에 끼어 돕게 하였습니다. 군신이 마음을 합치고 상하가 합치는 것, 구천(勾踐)이 회계(會稽)에서 궁하였을 때와 같습니다. 이때에 이를 치면 조나라가 굳게 지킬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한 군세에 싸움을 걸어도 나오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 국도를 포위해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또 여러 성읍을 공격해도 함락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야(郊野)의 전답을 약탈해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성과가 없으면 제후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되고 타국의 구원이 올 것입니다. 소신에게는 해로운 것만 보이고, 조나라를 치는 이익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아직 가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응후는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백기(白起)가 없다고 해서 내가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겠는가.”

그리고는 또 다시 군을 동원하여 왕릉(王陵) 대신에 왕걸(王齕)을 보내어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한단(邯鄲)을 포위하기를 8, 9개월이 되어도 사상하는 자가 많았지만 조나라는 항복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왕은 경장한 정예를 출몰시켜 배후를 쳐서, 진나라는 종종 열세에 몰렸다. 무안군이 말하였다.

“소신의 계교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는 심하게 노하여 무안군을 만나 억지로 기용하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병중이라고는 하나 나를 위해 억지로라도 누운 채로 군대를 거느리고 공을 세우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내 뜻을 따르면 장차 큰 상을 내릴 것이로되, 만약 끝까지 거절한다면 내 그대를 깊이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무안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소신은 가기만 하면 공이 없어도 죄를 모면할 수 있고, 가지 않으면 죄가 없어도 주살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원컨대 대왕께서는 소신의 어리석은 계책을 살피시어 조나라를 버리고 백성을 쉬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여 제후간의 동정을 관망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쪽을 위로하고 교만한 쪽을 치고 무도한 자를 주멸하여 제후에게 분부를 내리시면 천하의 패권은 안정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꼭 조나라부터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한 사람의 신하에게 굽히고 천하의 제후에게 이긴다[一臣屈而勝天下일신굴이승천하]’는 것이며, 만약에 대왕께서 소신의 어리석은 계책을 깨닫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조나라에 쾌재를 부르게 하고 소신을 죄짓게 하고 싶으시다면, 이른바 ‘한 사람의 신하에게 이기고 천하의 제후에게 굽힌다’는 것이 됩니다. 도대체 일개 신하에게 이기는 위엄과 천하의 제후에게 이기는 위엄 중 어느 쪽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은 ‘명석한 군주는 그 나라를 사랑하고, 충신은 그 이름을 사랑한다[明主愛其國, 忠臣愛其名.]’고 들었습니다. 한번 망한 나라는 두 번 다시 일으킬 수 없고, 한 번 죽은 병졸은 두 번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소신은 엎드려 무거운 주벌을 받을지라도 싸움에 져서 군을 욕되게 하는 대장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이 점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아무 대답도 없이 나갔다.

<전국책 : 중산책>


昭王旣息民繕兵, 復欲伐趙, 武安君曰:“不可.” 王曰:“前年國虛民飢, 君不量百姓之力, 求益軍糧以滅趙. 今寡人息民以養士, 蓄積糧食, 三軍之俸, 有倍於前, 而曰 ‘不可’. 其說何也?”
武安君曰:“長平之事, 秦軍大剋, 趙軍大破; 秦人歡喜, 趙人畏懼. 秦民之死者厚葬, 傷者厚養, 勞者相饗, 飮食餔餽, 以靡其財; 趙人之死者不得收, 傷者不得療, 涕泣相哀, 勠力同憂, 耕田疾作, 以生其財. 今王發軍雖倍其前, 臣料趙國守備亦以十倍矣. 趙自長平已來, 君臣憂懼, 早朝晏退, 卑辭重幣, 四面出嫁, 結親燕・魏, 連好齊・楚, 積慮幷心, 備秦爲務. 其國內實, 其交外成. 當今之時, 趙未可伐也.” 王曰:“寡人旣以興師矣.” 乃使五校大夫王陵將而伐趙. 陵戰失利, 亡五校. 王欲使武安君, 武安君稱疾不行.
王乃使應侯往見武安君, 責之曰:“楚地方五千里, 持戟百萬. 君前率數萬之衆入楚, 拔鄢郢, 焚其廟, 東至竟陵, 楚人震恐, 東徙而不敢西向. 韓・魏相率, 興兵甚衆, 君所將之不能半之. 而與戰之於伊闕, 大破二國之軍, 流血漂鹵, 斬首二十四萬. 韓・魏以故至今稱東藩. 此君之功, 天下莫不聞. 今趙卒之死於長平者已十七・八, 其國虛弱, 是以寡人大發軍, 人數倍於趙國之衆. 願使君將, 必欲滅之矣. 君嘗以寡擊衆, 取勝如神, 況以彊擊弱, 以衆擊寡乎?”
武安君曰:“是時楚王恃其國大; 不恤其政, 而羣臣相妬以功, 諂諛用事, 良臣斥疎, 百姓心離, 城池不修, 旣無良臣, 又無守備. 故起所以得引兵深入, 多倍城邑, 發梁焚舟, 以專民以, 掠於郊野, 以足軍食. 當此之時, 秦中士卒, 以軍中爲家, 將帥爲父母, 不約而親, 不謀而信, 一心同功, 死不旋踵. 楚人自戰其地, 咸顧其家, 各有散心, 莫有鬪志. 是以能有功也. 伊闕之戰, 韓孤顧魏, 不欲先用其衆. 魏恃韓之銳, 欲推以爲鋒. 二軍爭便之力不同. 是以臣得設疑兵, 以待韓陣, 專軍幷銳, 觸魏之不意. 魏軍旣敗, 韓軍自潰, 乘勝逐北, 以是之故, 能立功. 皆計利形勢自然之理, 何神之有哉! 今秦破趙軍於長平, 不遂以時乘其振懼而滅之, 畏而釋之, 使得耕稼以益蓄積, 養孤長幼以益其衆, 繕治兵甲以益其强, 增城浚池以益其固; 主折節以下其臣, 臣推體以下死士. 至於平原君之屬, 皆令妻妾補縫於行伍之閒. 臣人一心, 上下同力, 猶勾踐困於會稽之時也. 以合伐之, 趙必固守; 挑其軍戰, 必不肯出; 圍其國都, 必不可剋; 攻其列城, 必未可拔; 掠其郊野, 必無所得; 兵出無功, 諸侯生心, 外救必至. 臣見其害, 未覩其利; 又病, 未能行.”
應侯慙而退, 以言於王. 王曰: “微白起, 吾不能滅趙乎?” 復益發軍, 更使王齕代王陵伐趙. 圍邯鄲八・九月, 死傷者衆, 而弗下. 趙王出輕銳, 以寇其後, 秦數不利. 武安君曰:“ 不聽臣計, 今果何如?” 王聞之怒, 因見武安君, 彊起之, 曰:“君雖病, 彊爲寡人臥而將之. 有功, 寡人之願, 將加重於君:如君不行, 寡人恨君.”
武安君頓首曰: “臣知行雖無功, 得免於罪; 雖不行無罪, 不免於誅. 然惟願大王覽臣愚計, 釋趙養民, 以諸侯之變. 撫其恐懼, 伐其憍慢, 誅滅無道, 以令諸侯, 天下可定, 何必以趙爲先乎? 此所謂 ‘爲一臣屈而勝天下’也. 大王若不察臣愚計, 必欲快心於趙, 以致臣罪, 此亦所謂 ‘勝一臣而爲天下屈’者也. 夫勝一臣之嚴焉, 孰若勝天下之威大耶? 臣聞明主愛其國, 忠臣愛其名. 破國不可復完, 死卒不可復生. 臣寧伏受重誅而死, 不忍爲辱軍之將. 願大王察之.” 王不荅而去. 【戰國策 : 中山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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