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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타[網打], 망탁[莽卓], 망탕산[芒碭山], 망통[望筒], 망투어각[妄投於閣]


망타[網打]  일망타진(一網打盡). 한 번 그물을 쳐서 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으로,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다 잡음을 이르는 말. 한꺼번에 모조리 잡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식암황공행장(息庵黃公行狀)에 “무신(戊申: 1608년 선조41) 1월에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여 체직되었는데 얼마 뒤에 선조께서 승하하였다. 성복(成服)을 하고 장남 기성공 황유중(黃有中)과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때 광해군이 새로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자들이 덕망 있는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여 공 또한 논박을 받아 삭직되어 두문불출하고서 한가하게 지냈다.[戊申正月. 累辭得遞, 未幾宣廟昇遐. 服旣成, 與長男騎省公下鄕. 時光海新卽位, 用事者網打善類, 公亦被論削, 杜門閒居.]”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망탁[莽卓]  동한(東漢)의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을 아울러 칭한 말이다. 왕망은 왕위를 찬탈하여 자칭 황제가 되고 신법(新法)을 만들어 백성을 괴롭히다가, 만년에 광무제(光武帝)가 기병(起兵)함으로 인해 상인 두오(杜吳)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동탁 역시 음란하고 흉악한 자로 왕위를 농락하며 찬역을 도모하다가 끝내는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한서(漢書) 권99, 후한서(後漢書) 권102 영웅기초(英雄記抄)>

망탕[芒碭]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망탕은 원래 두 개의 산 이름인데, 탕산은 강소성(江蘇省) 탕산형(碭山縣) 동남쪽에 있고 망산은 하남성(河南城) 영성현(永城縣) 경계에 있는데 두 산의 거리는 4리 정도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늘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며 동쪽으로 순행하여 그 기운을 누르려 하자, 유방(劉邦)은 자칫 자신이 화를 입을까 싶어 망산(芒山)·탕산(碭山)의 습지대에 숨어 지냈다. 번쾌도 그때 유방과 함께 숨어 지냈는데, 그때부터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항우(項羽)보다 먼저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할 때까지 언제나 방패를 들고 함께 했다. <漢書 卷8 高祖本紀, 卷41 樊噲傳>

망탕산[芒碭山]  망산(芒山)과 탕산(碭山)을 합칭한 것으로, 지금의 안휘성(安徽省)에 있다. 진 시황(秦始皇)이 항상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라고 하여 동쪽으로 행차하여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다. 훗날 한 고조(漢高祖)가 되는 유방(劉邦)이 이는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망탕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오색구름이 떠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가 자신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도망쳐 숨었는데,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일대의 늪지 깊은 골짜기 사이에 숨었다.[高祖即自疑亡匿, 隱於芒碭山澤巖石之閒.]”라고 하였다.

망탕지운[芒碭之雲]  망탕(芒碭)의 구름. 망탕은 망산(芒山)과 탕산(碭山)이다. 진시황이 동남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 하여 동쪽으로 순시를 나가 그 기운을 억누르자 고조(高祖)가 도망하여 망산과 탕산의 산중에 숨어다녔다. 그러나 여후(呂后)는 고조가 아무리 깊은 산중에 있어도 늘 찾아내었으므로 고조가 이상히 여겨 그 방법을 물으니, 여후가 말하기를 “당신이 계신 곳에는 항상 하늘에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서 그 구름을 따라가면 늘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망탕채운[芒碭彩雲]  망탕산(芒碭山)의 채색구름. 진 시황(秦始皇)이 늘 ‘동남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 하여, 동쪽으로 행차하여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는데, 훗날 한 고조(漢高祖)가 된 유방(劉邦)이, 자신이 장본인이라 여겨 망탕산으로 숨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오색구름이 서려 있으므로 그의 처 여씨(呂氏)가 찾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망탕천자기[芒碭天子氣]  망탕산(芒碭山)에 천자의 기운. 진 시황이 늘 “동남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동쪽으로 행차하여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는데, 훗날 한 고조(漢高祖)가 된 유방(劉邦)이 자신이 장본인이라 여겨 망탕산으로 숨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오색구름이 떴다 한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시황제는 일찍이 말하기를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동방 순시를 통해 이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다. 고조가 자신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도망쳐 숨었는데,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일대의 늪지 깊은 골짜기 사이에 숨었다. 여후(呂后)는 사람들과 함께 고조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언제나 찾아냈다. 고조가 괴상하게 여겨 물었다. 여후가 ‘당신 있는 곳에는 늘 구름 같은 기운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언제나 당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고조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패현에 있는 젊은이 중 어떤 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다.[秦始皇帝常曰: ‘東南有天子氣’, 於是因東游以厭之. 高祖即自疑亡匿, 隱於芒碭山澤巖石之閒. 呂后與人俱求, 常得之. 高祖怪問之. 呂后曰: ‘季所居上常有雲氣, 故從往常得季.’ 高祖心喜. 沛中子弟或聞之, 多欲附者矣.]”라고 하였다.

망통[望筒]  삼망(三望)을 기록한 망단자(望單子). 세 사람이 후보자를 열기(列記)한 추천서.어떤 직임에 합당한 자를 적은 문서로, 곧 후보 명단을 말한다. 망단자(望單子), 망기(望記)라고도 한다. 의망단자(擬望單子).

망투어각[妄投於閣]  망령되이 누각에서 몸을 던짐.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서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과 견풍(甄豊)이 모두 상공(上公)이 되었다. 왕망(王莽)은 부명(符命)으로써 스스로 황제(皇帝)가 되었지만 그 부명(符命)의 근원을 끊고 싶었는데, 견풍(甄豊)의 아들 견심(甄尋)과 유흠(劉歆)의 아들 유분(劉棻)이 다시 부명(符命)을 바쳤다. 발끈한 왕망은 견풍 부자를 주살하고 유분은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글에 연루된 사람들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잡아들였다. 당시 양웅(揚雄)은 천록각(天祿閣)에서 도서를 교정하고 있었는데, 옥사(獄事)를 담당하는 사자(使者)가 와서 양웅(揚雄)을 데려가려 하자, 양웅은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고서 스스로 천록각 위에서 몸을 던져 거의 죽을 뻔하였다. 왕망이 그 소식을 듣더니 양웅은 본래 이 일과는 무관한데,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 하고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유분이 일찍이 양웅에게서 기자(奇字: 6체서六體書의 하나)를 배운 적이 있어 양웅이 상황을 잘 모르고 그런 것이라 함에, 문책하지 말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경사(京師)에서는 그 일을 놓고서 ‘오직 적막(寂寞)해서 스스로 건물에서 뛰어내렸고, 청정(淸靜)해서 부명(符命)을 만들어내었다.[惟寂寂, 自投于閣 ; 爰清靜, 無作符命.]’라는 얘기를 했다.”라 하였다. 양웅이 해조(解嘲)에서 “청정(淸淨)하게 신(神)의 뜰에서 노닐고, 오직 적막(寂寞)하게 덕(德)의 집을 지킨다.[爰清爰静, 游神之庭 ; 惟寂惟寞, 守德之宅.]”라고 하였는데, 경사(京師)에서 이 말을 근거로 양웅을 풍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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