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처럼 영명한 사람이
여후가 반드시 척희를 죽일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한 것은
이미 그 화가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고
도주공처럼 지모가 뛰어난 사람이
장남이 반드시 차남을 죽게 할 것을 알고도 보호 못한 것은
그 죄가 이미 용서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以漢高祖之英明, 知呂后必殺戚姬, 而不能救止, 蓋其禍已成也.
이한고조지영명, 지여후필살척희, 이불능구지, 개기화이성야.
以陶朱公之智計, 知長男必殺仲子, 而不能保全, 殆其罪難宥乎.
이도주공지지계, 지장남필살중자, 이불능보전, 태기죄난유호.
<圍爐夜話위로야화>
- 한고조[漢高祖] 한(漢)나라의 시조 유방(劉邦)을 이른다. 성(姓)은 유(劉)이고 이름은 방(邦)이며, 자는 계(季)이다. 한(漢)나라의 제1대 황제로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교유하였다. 진(秦)나라 말기에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였는데 이 때 유방도 지역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서 기병하여 진나라 타도에 참가하였다. 진나라 멸망 후 그는 4년간에 걸친 항우(項羽)와의 쟁패전에서, 소하(蕭何)・조참(曹參)・장량(張良)・한신(韓信) 등의 도움으로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B.C. 202년 황제가 되어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결정하였다.
- 한고조[漢高祖] 오대(五代) 때 후한(後漢)을 개국한 유지원(劉知遠)을 가리킨다. 재위기간은 947∼948이다.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후진(後晉) 석경당(石敬瑭)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겸하였다. 거란(契丹)이 후진(後晉)을 침공하자 출병을 거부하였고, 소제(少帝)가 거란에게 연행되고 후진(後晉)이 망하자, 진양(晉陽)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즉위 후 이름을 고(暠)로 고쳤다.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하고 변주(汴州: 변경汴京)로 도읍을 옮겼으나, 1년 만에 병사하였다.
- 영명[英明] 영민(英敏)하고 총명(聰明)함. 영명하다. 뛰어나게 슬기롭고 총명하다.
- 여후[呂后]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황후(皇后)로, 이름은 치(雉)이고 자는 아후(娥姁)이다. 세칭 여태후(呂太后)라 한다. 유방(劉邦)이 젊었을 때에 고향에서 결혼한 본실 부인이다. 여후의 아버지가 유방(劉邦)을 일찍이 알아보고 딸을 주었다. 여치(呂雉)는 재략(才略)이 있었고 고생을 견디며 유방(劉邦)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고, 혜제(惠帝)를 낳았다.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뒤에 여치의 아들 혜제(惠帝)가 즉위하였으나 7년 만에 죽자, 후궁의 몸에서 난 태자 유공(劉恭: 소제少帝)을 어린 나이에 즉위시키고 임조(臨朝) 칭제(稱制)하여 8년 동안 정치를 맡았다. 자기 큰 오라비의 아들인 여산(呂産)과 작은 오라비의 아들인 여녹(呂祿) 등을 각각 양왕(梁王)·조왕(趙王) 등에 봉(封)하고 제위를 엿보았으나, 직접 정사를 본 지 8년 만에 죽었다. 여후(呂后)가 죽자 여씨들은 불안을 느껴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발(周勃)·진평(陳平) 등에 의하여 주멸(誅滅)되었다.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후에 척희(戚姬)와 그 아들 여의(如意)를 잔인하게 죽인 이야기가 유명하다.
- 여후살척희[呂后殺戚姬]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었을 때에 척씨(戚氏)를 얻어 사랑하여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낳았는데, 고조가 여후(呂后)의 소생인 태자(太子: 혜제惠帝)는 사람됨이 인약(仁弱)한데 여의는 자기를 닮았다 하여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세우려 하였고, 척씨도 자기 소생을 태자로 세워 달라고 고조에게 호소하였다. 뒤에 고조가 죽고 나서 여후가 척씨를 궁중의 옥에 가두고 수의(囚衣)를 입혀 방아를 찧게 하였는데, 척씨가 방아를 찧으며 “아들은 왕이건만 어미는 수인(囚人)이 되어 저물도록 방아 찧어 사수(死囚)와 함께 있네. 3천 리 떨어졌으니 누가 네게 알리랴.[子爲王, 母爲虜. 終日舂薄暮, 常與死爲伍. 相離三千裏, 當誰使告女.]”라고 노래하였다. 이 일로 여후가 노하여 조왕 여의를 죽이려 하였는데, 혜제가 보호하였으나 틈을 타서 독살하였다. 그리고 척씨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고 귀를 지지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변소에 살게 하고 ‘사람 돼지[人彘]’라 불렀다. 혜제가 이를 보고는 병이 나서 한 해 남짓 앓았는데, 사람을 시켜 여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此非人所爲. 臣爲太後子, 終不能複治天下.]”라 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7년 만에 죽었다.
- 척희[戚姬] 전한(前漢) 제음(濟陰) 정도(定陶) 사람으로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총희(寵姬)이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낳았다. 고조의 총애를 받아 황후인 여후(呂后)의 질투를 받았다. 고조는 척희를 사랑한 반면에 여후(呂后)가 낳은 태자가 인자하고 나약하여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아들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계책을 써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불러 태자의 빈객으로 삼으니, 고조가 척 부인을 불러 “나는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상산사호가 그를 도와 우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바꾸기 어렵소.[我欲易之, 彼四人爲之輔, 羽翼已成, 難動矣.]”라 하고는 결국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고조는 자신의 사후에 척희와 여의가 여후에게 해를 입을 것을 크게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때 어린 나이로 부새 어사(符璽御史)가 된 조요(趙堯)가 여후와 태자와 군신들이 평소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주창(周昌)을 조왕 여의의 상국(相國)으로 임명하면 척희와 여의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하였다. 주창은 처음에는 자신을 좌천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고조의 진심과 간곡한 부탁을 듣고는 조나라의 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조가 죽고 혜제(惠帝) 즉위하였다. 고조가 죽은 뒤 여후는 조왕 여의를 세 번이나 소환했으나 그때마다 주창은 병을 핑계로 여의가 도성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여후는 먼저 주창을 소환한 다음, 주창이 없을 때 여의를 소환하여 짐살(鴆殺)하고, 척희를 궁중 감옥인 영항(永巷)에 구금한 뒤 머리를 깎고 붉은 죄수복을 입혀 방아를 찧게 하였다. 뒤에는 수족(手足)을 모두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에 뜨거운 김을 불어 넣었으며, 약을 써서 귀머거리에 벙어리로 만들어서 측소(厠所: 변소)에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인체(人彘: 인간 돼지)라 이름하고 이를 혜제(惠帝)에게 보였다. 혜제는 이에 충격을 받아 한 해 남짓 병으로 앓았고, 음락(淫樂)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은 지 7년 만에 죽었다. 여후가 8년 동안 집권한 뒤에 죽으니, 주발(周勃)·진평(陳平)·유장(劉章) 등이 여씨(呂氏) 일족을 다 죽이고 문제(文帝)를 세웠다. 희(姬)는 본래 부인(婦人)의 미칭이다. 한(漢)나라 때 두었던 내관(內官)의 한 계급으로 품계가 2천 석에 비견되었는 바, 위차(位次)가 첩여(婕妤)의 아래였다.
- 구지[救止] 규정(糾正). 비위(非違)나 올바르지 않은 것을 캐고 밝혀 냄. 비위를 밝힘. 잘못을 바로잡음. 저지(阻止)하다. 가로막다.
- 도주공[陶朱公] 도주공(陶朱公)은 춘추(春秋)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모신(謀臣)인 범려(范蠡)의 별칭이다. 월왕이 오왕(吳王) 부차(夫差)로부터 회계(會稽)에서 치욕을 당한 후, 범려가 미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미인계로 마음을 현혹시켜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범려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범려에게 말하기를 “내 장차 그대와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가질 것이다.”라고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임금은 명령을 행하고 신하는 뜻을 행하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범려는 월왕과는 더불어 안락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서시(西施)를 데리고 서호(西湖)에 배를 띄워 떠나 버렸는데, 제(齊)나라에 들어가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姓名)을 바꾸고 무역과 농목(農牧)에 종사하여 부자가 되었다. 제왕(齊王)이 그를 승상으로 삼자, 범려는 승상인(丞相印)을 돌려주고 재물을 다 흩어 친지와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어진 일을 하고서, 도(陶)로 가서 다시 재산을 모아 억만장자가 되니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으로 불렀다. 노(魯)나라의 부인(富人) 의돈(猗頓)이 일찍이 매우 가난했을 때, 도주공이 거부란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서 부자가 되는 지혜를 묻자, 도주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속히 부자가 되고 싶으면 소, 말, 돼지, 양, 당나귀의 다섯 가지 암컷[五牸]을 길러야 한다.”고 하므로, 의돈이 그대로 시행하여 그 역시 거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史記 卷129 貨殖列傳>
- 도주공[陶朱公] 춘추(春秋)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월(越)나라 대부였던 범려(范蠡)의 별칭이다. 자는 소백(少伯)이고 치이자피(鴟夷子皮) 혹은 도주공(陶朱公)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생졸 연도는 불확실하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도와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격파하고 패업을 달성하게 한 후에는 이름과 성을 숨기고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 월나라를 떠나 있던 범려는 월나라에서 함께 일한 대부 문종(文種)에게 “하늘을 날던 새를 잡고 나면 활은 거둬 감춰지고,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하던 개는 삶아져 먹힙니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이 새의 부리를 닮았으며 매처럼 보고 이리처럼 걷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를 해하게 될 것입니다.[高鳥已散, 良弓將藏; 狡兔已盡, 良犬就烹. 夫越王為人, 長頸鳥喙, 鷹視狼步, 可與共患難而不可共處樂, 子若不去, 將害於子.]”라고 서신을 보냈다. 문종은 범려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는 결국 월왕의 의심을 사 목숨을 잃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바다로 나아가 제(齊)나라 땅에 도착한 범려는 그곳에서 경영과 농업과 상업으로 그때마다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세 차례 모두 일군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과 소원한 친척들에게 나눠주었다. 최후로 큰 재산을 모은 범려는 도읍(陶邑)이란 곳에 거처를 정하고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하며 살았다. 그가 큰 부를 이뤘을 때, 노(魯)나라 사람 의돈(猗頓)이 그를 찾아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자 범려가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라’고 알려주었고, 이 말을 듣고 따른 의돈은 십 년 뒤에 큰 부자가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이 천하의 부자를 말할 때 도주(陶朱) 또는 의돈(猗頓)이라고 했다. 후대의 상인들이 범려의 상을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리며 재신(財神)으로 받들어 모셨다.
- 지계[智計] 지략. 지모(智謀). 지혜가 있는 계획. 계략. 참고로,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조조(曹操)는 지모와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고 용병(用兵)에 있어서도 손무(孫武)나 오기(吳起)를 방불케 하였으나, 남양(南陽)에서는 곤경에 처했고 오소(烏巢)에서는 위험을 겪었으며 기련(祁連)에서는 위태로웠고 여양(黎陽)에서는 궁지에 몰렸으며, 북산(北山)에서는 거의 패망할 지경이었고, 동관(潼關)에서는 죽을 지경에 이른 후에야 임시로나마 평정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재능이 모자란 신(臣)이 위험을 겪지 않고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입니다.[曹操智計殊絕於人, 其用兵也, 髣髴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偪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 도주공장남[陶朱公長男] 도주공(陶朱公)의 맏아들. 범려(范蠡)의 둘째 아들을 구명하러 갔던 큰아들이 재물을 아끼려다 결국 둘째 아들을 죽게 하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였다. 재물을 아끼려다 낭패하게 된 사람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나오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 도주공(陶朱公)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재상이었던 범려(范蠡)이다. 구천(句踐)과 힘을 합하여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월(越)나라를 떠나 거부(巨富)가 되었을 때, 그의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楚)나라의 옥에 갇혔다. 범려(范蠡)는 “사람을 죽였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듣자 하니 ‘천금의 집 자식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殺人而死, 職也. 然吾聞千金之子不死於市.]”라고 하고는 둘째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막내아들을 보내려 하였지만, 맏아들이 장남(長男)으로서 체면을 내세우며 필사적으로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므로 하는 수 없이 맏아들을 보내다. 도주공(陶朱公)의 장남(長男)이 아버지의 당부에 따라 금전을 가지고 장생(莊生)에게 가서 사면을 부탁하니 장생이 장남에게 즉시 떠날 것을 다짐받고 초왕(楚王)에게 대사면을 실시할 것을 상주하였다. 장남은 동생이 풀려날 상황이 되자 장생에게 주었던 금을 아깝게 여겨, 장생에게 찾아가 금을 돌려받고 싶은 내색을 하자 장생이 금을 돌려주었다. 장생은 장남이 약속을 어긴 것을 괘씸하게 여겨 초왕에게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들 ‘도주공은 부자이고 또 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수감되자 그 집에서 금전을 가지고 왕의 좌우에 뇌물을 준다’고 말들을 합니다.[道路皆言, 陶之富人, 朱公之子殺人, 囚楚, 其家多持金錢, 賂王左右.]”라고 아뢰자, 초왕이 노하여 주공의 둘째 아들을 사형시키고, 그 다음 날 사면을 실시하였다. 주공의 맏아들은 동생의 유해만을 수습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주공이 허탈하게 웃으며 “내 진작 맏이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줄 알았다. 이는 맏이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돈을 아까워하며 차마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맏이는 어려서부터 늘 나와 함께 하면서 고생스럽던 때를 지켜보았고, 생활고를 겪었기 때문에 돈 쓰기를 어렵게 여긴다. 하지만 막내가 자랄 때는 내가 부유해진 이후였기 때문에 좋은 말과 마차를 타면서 토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러니 돈이 생기는 이치를 어찌 알겠는가? 따라서 돈 쓰기를 가볍게 여긴다. 그래서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 전에 내가 막내를 보내고자 했던 것은 막내가 돈을 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맏이가 돈을 쓸 줄 몰라 기어코 동생을 죽게 하였으니 이치가 그렇다고 해야 할 뿐, 슬퍼할 일이 못 된다. 나는 밤낮으로 둘째의 시신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俱, 見苦, 為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乘堅驅良逐狡兔, 豈知財所從來, 故輕棄之, 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 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事之理也, 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라고 하였다. <전문보기>
- 중자[仲子] 둘째 아들. 아들 가운데 두 번째 아들.
- 보전[保全] 온전(穩全)하게 보호(保護)하여 유지(維持)함. 온전하게 잘 지키거나 유지함. 참고로, 송사(宋史) 권316 조변전(趙抃傳)에 “조변(趙抃)은 송(宋) 나라 인종(仁宗) 때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으면서 권세가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까지도 거리낌 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철면어사(鐵面御史)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는데, 그가 조정에서 항상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람이 소인이라면 비록 작은 잘못이라도 힘껏 막아서 끊어야 하겠지만, 군자가 불행히도 잘못 저촉되었을 때에는 마땅히 그를 온전히 보호하고 아껴서 그 덕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小人雖小過, 當力遏而絶之, 君子詿誤, 當保全愛惜, 以成就其德.]’라고 하였다.”고 한 데서 보인다.
【譯文】 漢高祖之英明不能救戚姬, 陶朱公之智計不能保仲子.
像漢高祖那么大略的帝王, 明知在他死後呂后會殺死他最心愛的戚夫人, 卻無法挽救阻止, 乃是因為這個禍事已經造成了, 而如陶朱公那么足智多謀的人, 明知他的長子非但救不了次子, 反而會害了次子, 卻無法保全此事, 大概是因為次子的罪本來就讓人難以原諒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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