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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라[莽何羅], 망하례[望賀禮], 망합[莽哈], 망해[芒蟹], 망해조사[望海潮詞]


망하라[莽何羅]  망하라(莽何羅)는 한 무제(漢武帝)의 총신(寵臣)으로, 친구인 강충(江充)이 태자를 무고(誣告)하였다가 사실이 밝혀져 처형되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조칙을 거짓으로 작성하여 군대를 동원시켜 모반하였는데, 이른 새벽에 황제를 시해하려 칼을 품고 들어가다가 김일제(金日磾)에게 발각되어 결국 죽음을 당하였고, 김일제는 봉후(封侯)되었다 본래의 성(姓)은 마씨(馬氏)였는데, 후한(後漢) 때의 명덕 마후(明德馬后)가 동성(同姓)인 것이 부끄럽다고 하여 망씨(莽氏)로 고치게 하였다.

망하례[望賀禮]  경절(慶節)에 수령이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 경절(慶節)에 외방의 신하가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 외방(外方)에 나가 있는 신하가 대궐편을 바라보고 거행하는 예식(禮式). 조선 때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에 원이 궐패에 절하던 예식이다.

망하루[望荷樓]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고향마을인 소내[苕川]에 있는 누각이다. 다산 31세 때인 임자년(1792) 여름 다산의 부친이 임지인 진주(晉州)에서 별세하자 하담(荷潭)으로 반장(反葬)을 하고 소내에서 거상하면서, 그곳에서 2백 리 거리인 묘소가 있는 하담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다산의 백씨(伯氏)가 목공을 시켜 그가 살고 있는 집 동남쪽 절반을 잘라 만든 누대이다. <與猶堂全書 一集 卷十三 望荷樓記>

망합[莽哈]  귀화한 여진의 추장이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산찰(産察)과 망합(莽哈)은 제일 강한 추장으로 여러 부(部)에서 추앙 복종하는 자들이며, 지금 또 나서서 박귀동 등을 돌려보내는 일을 고하였으니, 그들의 소원대로 서울에 올라오게 하고 벼슬을 제수하여 후일에 쓰임이 되게 하소서.”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망해[芒蟹]  꺼끄러기가 있는 게. 팔월(八月)이 되면 게[蟹]의 뱃속에 꺼끄러기[稻芒]가 있는데, 길이가 한 치나 된다. 동쪽으로 향하여 해신(海神)에게 바치는데, 그것을 마치지 않으면 먹지 못한다 한다.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 인개(鱗介)에 “게가 8월에는 배 속에 까끄라기를 갖게 되는바, 이것은 틀림없는 벼 까끄라기로 길이가 1촌쯤 되는데, 이것을 동쪽의 해신에게 바친다. 이것을 바치기 전에는 게를 먹을 수 없다.[蟹, 八月腹中有芒, 芒眞稻芒也, 長寸許, 向東輸與海神, 未輸不可食.]”라고 하였다.

망해대[望海臺]  망해대(望海臺)는 울주팔경(蔚州八景)의 하나로,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청량면(淸涼面) 율리(栗里) 망해사(望海寺) 터에 위치한 곳이다.

망해대[望海臺]  순천부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신성포(新城浦)에 있는 대(臺)로, 1597년(선조30)에 왜추(倭酋) 평행장(平行長)이 수군을 이끌고 그 아래 정박해, 세 봉우리를 깎아 평평하게 하고 지세를 따라 큰 돌을 쌓아 만들었다 한다.

망해대[望海臺]  전남 여수시 진남관(鎭南館) 앞의 누대 이름이다.

망해도[望海圖]  망해도법(望海圖法). 망해도법은 곧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육지에서 건너다보고 그 거리를 측정하는 산법(算法)이다.

망해도술[望海島術]  망해도술(望海島術)이란 글자 그대로 바다 가운데 섬의 높이와 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술이다. 이 글은 주세걸(朱世傑)의 산학계몽(算學啓蒙)에 부록으로 수록된 것으로서 남송의 양휘(楊輝)가 창안한 것이다.

망해루[望海樓]  망해루(望海樓)는 항주성(杭州城) 안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던 높이 18장(丈)의 누각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항주춘망(杭州春望) 원주(原注)에 “성 동쪽의 누각 이름이 망해루이다.[城東樓名望海樓.]”라고 하였다.

망해루[望海樓]  중국 산해관(山海關)에 있는 누대 이름이다.

망해암[望海庵]  김포(金浦) 가현산(歌絃山)에 있는 암자이다.

망해정[望海亭]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자 산해관 옆인 노룡두(老龍頭) 바다에 위치한 누각이다.산해관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 정자로 징해정(澄海亭)이라고도 한다. 망해정에 대한 기록은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연기(燕記) 망해정에 “산해관 남쪽에 망해정이 있고 북쪽에 각산사가 있는데, 하루에 다 볼 수는 없다. …… 이 정자는 만리장성의 맨 끝에 있는데, 바다로 수백 보쯤 쑥 들어가 2층으로 성 위에 높이 솟아 있고, 10여 개의 계단 층계가 있었다.”라고 자세히 보인다.

망해정[望海亭]  산해관(山海關)에 위치한 누정이다. 산해관 남쪽에 망해정이 있고 산해관 북쪽에는 각산사(角山寺)가 있다. 이곳에 ‘천개해악(天開海岳)’과 ‘일작지다(一勺之多)’라고 쓰인 비석이 두 개 있다.

망해정[望海亭]  의자왕 15년(655)에 부여의 왕궁 남쪽에 세운 정자이다.

망해정[望海亭]  함경도 길성현(吉城縣) 성진진(城津鎭)에 있다. 1615년(광해군7) 함경도 순찰사 최관(崔瓘)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병사 이영상(李英相)과 함께 본래 있던 토성의 외곽에 석성(石城)을 둘러 쌓고 바다에 닿은 양쪽의 성곽 끝자락에 초문(譙門)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영해루(嶺海樓), 망해정(望海亭), 조일헌, 참경대(斬鯨臺) 등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망해조[望海潮]  망해조(望海潮)는 사(詞) 의 제목이 아니라 사(詞)를 노래할 때의 악곡(樂曲) 이름이다. 망해조(望海潮)와 같은 장편사(長篇詞)를 만사(慢詞)라고 하는데, 유영(柳永)이 확립한 문학 장르이다.

망해조사[望海潮詞]  송(宋) 나라 때 손하(孫何)가 지항주(知杭州)로 있을 적에 그의 어릴 때 친구인 유기경(柳耆卿: 유영柳泳)이 찾아갔으나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유기경은 망해조사(望海潮詞)를 지어 손하의 앞에서 읊게 하였다. 손하는 유기경이 지은 것인 줄 알고 곧 유기경을 들어오게 하였다. 그 내용은 어릴 때 놀던 강남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靑泥蓮花記> 참고로, 유영(柳泳)이 망해조사(望海潮詞)에 서호(西湖)의 경치를 “가을 내 피어있는 계화, 십 리에 펼쳐진 연꽃[三秋桂子, 十里荷花.]”라고 읊었는데 이 구절을 금(金)나라 황제 완안량(完顔亮)이 보고는 “백만 군사를 서호가에 이끌고 가서, 오산 제일봉에 말을 세우리라.[提兵百萬西湖上, 立馬吳山第一峯.]”라는 시를 짓고 침범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天中記 卷10>

망해지휴[罔害之休]  제왕이나 그와 동격의 신분인 자의 병이 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병들었을 때, 주공(周公)이 점을 치고 말하기를 “점괘를 보니 왕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게 되겠다.[體王其罔害]”라고 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書經 金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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