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나에게 공격을 가하였을 때
부득이 대응하는 것을 응병이라 이르니
침략에 대응하는 전쟁은 승리한다.
남의 땅을 탐하는 것을 탐병이라 이르니
탐욕으로 일으킨 전쟁은 패배한다.
이것은 위상이 병법을 논하며 한 말이다.
그러나 어찌 전쟁에서만 그러하겠는가?
무릇 모든 세상사의 성패를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敵加於己, 不得已而應之, 謂之應兵, 兵應者勝.
적가어기, 부득이이응지, 위지응병, 병응자승.
利人土地, 謂之貪兵, 兵貪者敗. 此魏相論兵語也.
이인토지, 위지탐병, 병탐자패. 차위상논병어야.
然豈獨用兵爲然哉? 凡人事之成敗, 皆當作如是觀.
연기독용병위연재? 범인사지성패, 개당작여시관.
<圍爐夜話위로야화>
- 응병[應兵] 적의 침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것. 불가피하게 대응하는 전쟁 또는 군사 행위. 응병(應兵)은 용병(用兵)의 다섯 가지 경우 중의 하나로, 적군의 공격을 기다려서 응전하는 군대를 말하는데, 한서(漢書) 권74 위상전(魏相傳)에,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의 명상(名相)인 위상(魏相)은 선제(宣帝)가 장군 조충국(趙充國) 등의 말을 듣고 쇠약해진 흉노족(匈奴族)을 공격하려 하자, 글을 올려 간하기를 “어지러운 나라를 구원하고 포악한 군주를 주벌하는 군대를 의병(義兵)이라 하는데, 군대가 의로울 경우에는 왕자(王者)가 된다. 적이 우리를 공격하여 부득이하게 일으킨 군대를 응병(應兵)이라 하는데, 군대가 침략에 대응하여 일어난 경우에는 승리한다. 작은 일을 다투고 한스러워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으킨 군대를 분병(憤兵)이라 하는데, 군대가 분김에 일어난 경우에는 패한다. 남의 토지와 재화를 이롭게 여겨 일으킨 군대를 탐병(貪兵)이라 하는데, 군대가 탐욕으로 일어난 경우에는 깨진다. 국가가 큰 것을 믿고 백성이 많은 것을 뽐내어 적에게 위세를 보이고자 일으킨 군대를 교병(驕兵)이라 하는데, 군대가 교만으로 일어난 경우에는 멸망한다. 이 다섯 가지는 인사(人事)일 뿐만 아니라 바로 천도(天道)이다.[救亂誅暴, 謂之義兵, 兵義者王 ; 敵加於己, 不得已而起者, 謂之應兵, 兵應者勝 ; 爭恨小故, 不忍憤怒者, 謂之忿兵, 兵忿者敗 ; 利人土地貨寶者, 謂之貪兵, 兵貪者破 ; 恃國家之大, 矜民人之眾, 欲見威於敵者, 謂之驕兵, 兵驕者滅. 此五者, 非但人事, 乃天道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위상오병(魏相五兵).
- 탐병[貪兵] 남의 토지와 재화를 이롭게 여겨 일으킨 군대. 다른 이의 토지와 재화를 탐하는 것. 탐욕을 채우기 위한 전쟁 또는 군사 행위. 한서(漢書) 위상병길전(魏相丙吉傳)에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흉노(匈奴)가 침입하였으나, 한나라 군대는 이를 물리칠 수 없었다. 선제는 장군 조충국(趙充國)과 상의하였다. 그들은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출병하여 그들의 요지를 격파하여 다시는 서역(西域)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승상인 위상(魏相)이 글을 올려 간하기를 ‘신이 듣자오니, 어지러운 것을 구하고, 포악한 자를 죽이는 것을 의병(義兵)이라 일컬으니, 군사가 의로우면 제왕이 될 수 있습니다. 적이 내게 도전해 옴으로써 부득이 싸우게 되는 것을 응병(應兵)이라 하고, 군사가 응하여 일어나면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분병(忿兵)이라 하며, 군사가 분노의 전쟁을 하면 패하게 됩니다. 남의 토지나 재산을 탐내어 싸우는 것을 탐병(貪兵)이라 하는데, 군사가 탐내어 하는 전쟁은 격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나라의 큰 힘을 믿고 백성이 많음을 자랑하여 적에게 위세를 보이기 위한 싸움을 교병(驕兵)이라 하는데, 군사가 교만한 전쟁을 하면 멸망당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길은 단순한 인간사(人事)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법도이기도합니다.’라고 하였다. … 이에 황제는 위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쟁을 그만 두었다.[元康中, 匈奴遣兵擊漢屯田車師者, 不能下. 上與後將軍趙充國等議, 欲因匈奴衰弱, 出兵擊其右地, 使不敢復擾西域. 相上書諫曰: ‘臣聞之, 救亂誅暴, 謂之義兵, 兵義者王 ; 敵加於己, 不得已而起者, 謂之應兵, 兵應者勝 ; 爭恨小故, 不忍憤怒者, 謂之忿兵, 兵忿者敗 ; 利人土地貨寶者, 謂之貪兵, 兵貪者破 ; 恃國家之大, 矜民人之眾, 欲見威於敵者, 謂之驕兵, 兵驕者滅. 此五者, 非但人事, 乃天道也. …’ 上從其言而止.]”라고 한 데서 보인다. 위상오병(魏相五兵).
- 위상[魏相] 한 선제(漢宣帝) 연간의 재상이다. 자는 약옹(弱翁)이다. 제음(濟陰) 정도(定陶) 사람이다. 소제(昭帝) 때 현량(賢良)에 천거되어 대책(對策)으로 무릉령(茂陵令)이 되었다. 이후 하남(河南) 태수(太守), 양주(楊州) 자사(刺史) 등을 거쳤다. 이어서 간대부(諫大夫)가 되었고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에 대사농(大司農), 어사대부(御史大夫), 급사중(給事中) 등을 거쳐 지절(地節) 3년에 승상(丞相)이 되었다. 우장군(右將軍) 곽우(霍禹), 영상서사(領尙書事) 곽산(霍山) 등이 권력을 전횡하자 선제를 도와 축출하였다. 원강(元康) 연간에 흉노(匈奴)가 거사국(車師國)에 주둔한 한군(漢軍)을 공격한 데 대해 흉노 정벌이 논의되자, 상서를 올려 중단시켰다. 주역(周易)에 정통하여 음양(陰陽)을 만사(萬事)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역음양(易陰陽), 명당월령(明堂月令)을 채택하여 시기에 알맞은 조칙과 명령을 시행하도록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사에 있어서 엄정하고 강인하게 처결하였고 사회와 국정의 안정을 추구하여 병길(丙吉)과 함께 선제(宣帝)의 중흥을 보필하였다. 신작(神爵) 3년에 죽었다. 시호는 헌(憲)이다.
- 위상[魏相] 중국 전한(前漢) 소제(昭帝), 선제(宣帝) 연간의 문신이다. 자는 약옹(弱翁), 시호는 헌후(憲侯)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으면서 권력에 굽히지 않고 직간을 많이 하였다. 곽광(霍光)이 죽은 후 곽광의 아들과 조카 등 곽씨(霍氏)가 전횡하자 권력을 축소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승상(丞相)이 된 후 병길(丙吉)과 함께 국정을 보좌하였다.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진위를 잘 분변하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치죄를 엄격하게 하여, 외척 세력을 억제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위상은 역경(易經)에 밝았고 한나라 고사(故事)를 살펴보기를 좋아하였다. 현신(賢臣) 가의(賈誼), 조조(晁錯), 동중서(董仲舒)가 과거에 건의했던 정책들을 시행하기를 주청하였다. 위상은 원래 한나라 제음(濟陰) 정도(定陶) 사람인데 평릉(平陵)으로 이사하여, 어려서부터 역(易)을 배워 역경(易經)에 매우 밝았다. 그는 자주 음양(陰陽)에 관한 학설을 가지고 무제(武帝)에게 상소하여 “천지의 변화는 반드시 음양으로 말미암습니다.……음양이란 왕사(王事)의 근본이며 군생(群生)의 명(命)이니, 예로부터 현성(賢聖)이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역경(易經)에 밝고 음양에 능통한 네 사람을 선발하여 각각 한 계절씩 맡게 하여 음양의 조화를 잘 이루게 할 것을 권하였다. 참고로, 한서(漢書) 권74 위상전(魏相傳)에 “위상이 한나라의 고사(故事)와 편의장주(便宜章奏)를 살펴보는 것을 좋아하여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국가에 편리한 행사를 자주 조목조목 아뢰었다.[魏相好觀漢故事及便宜章奏, 數條漢興已來國家便宜行事.]”라고 하였다. 고사는 옛날의 훌륭한 일을 가리키며, 편의장주는 국가의 일에 편리하고 마땅한 상소문이나 건의서를 가리킨다.
- 연기[然豈] 설마. 어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 용병[用兵] 지휘관이 전투에서 군사(軍士)를 통솔하여 부림.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작전하는 일. 전쟁(戰爭)을 함. 군대를 부리다.
- 인사[人事] 인정사리(人情事理). 인간사(人間事).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일. 사람이 하는 일.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일. 만나거나 헤어질 때에 예를 갖추는 일. 또는 그러한 말이나 행동.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이름을 주고받으며 자기를 소개하는 일. 인간 사회의 사정. 개인의 의식(意識), 신분, 능력 따위에 관한 일. 개인의 일신상에 관한 일. 입은 은혜를 갚거나 치하(致賀)할 일 따위에 대하여 예의를 차림.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역모(逆謀)나 반란(叛亂) 등의 변화. 관리나 직원의 임용, 해임, 평가 따위와 관계되는 행정적인 일. 직원의 임용이나 해임, 평가 등과 관계되는 행정적인 일. 교유(交遊). 참고로, 후한서(後漢書) 가규전(賈逵傳)에서 “이 사람은 바깥에서 남들과 교유[人事]가 없습니다.”라 하였고, 진서(晉書) 왕장문전(王長文傳)에서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지키며, 남들과 교유[人事]하지 않았다.”라 하였다. 또, 한서(漢書) 두흠전(杜欽傳)에 “변화와 감응은 부류에 따라 반응하니 인사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달라진 천상이 위에서 드러난다.[變感以類相應, 人事失於下, 變象見於上.]”라고 하였고,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항간의 속담에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상고 시대를 자세히 살펴 그 시대에 증험해 보고, 세상일을 참조하여 성쇠의 이치를 관찰하며, 권세의 적합함을 세심히 살피어 버리고 얻는 것에 순서를 두고, 변화는 때에 따르기 때문에 세월이 오래 지속되고 사직도 안정되었던 것이다.[野諺曰: ‘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是以君子爲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以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變化有時, 故曠日長久而社稷安矣.]”라고 한 데서 보인다.
- 당작[當作] ~로 여기다. ~로 간주하다. ~로 생각하다. ~라고 여기다. ~로 삼다. 당주(當做). 참고로, 진(晉)나라의 문장가인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은 뒤에 친구인 범영기(范榮期)에게 “그대는 시험삼아 이 부(賦)를 땅에 던져 보게나, 의당 금석 소리가 날 것일세.[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하였다는 데서 보인다.
- 여시[如是] 이와 같이.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이와 같음. 이치에 맞고 그릇됨이 없음. 믿음이 확실하여 의심이 없음. 온갖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이르는 말. 모든 불경(佛經)의 첫머리에 있는 말. ‘이와 같이’의 뜻이다.
【譯文】 兵應者勝. 兵貪者敗.
敵人來攻打本國, 不得已而與之對抗, 這叫做 “應兵”, 不得已而應戰的必然能夠得勝. 貪圖他國土地, 叫做 “貪兵”, 爲貪得他國土地而作戰必然會失敗, 這是魏相論用兵時所講的話. 然而豈只是用兵打仗如此呢? 凡是人事的成功或失敗, 往往也是如此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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