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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없애는 방법, 가난을 떨치는 방법 <채근담>


더위를 다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더위를 괴로움으로 여기는 그 마음을 없애면

몸이 항상 서늘한 누대 위에 있게 된다.

가난을 떨쳐낼 수는 없을지라도

가난을 근심으로 여기는 그 생각을 떨쳐내면

마음이 항상 안락한 집 안에 살게 된다.


熱不必除,  而除此熱惱,  身常在淸凉臺上.
열불필제,  이제차열뇌,  신상재청량대상.
窮不可遣,  而遣此窮愁,  心常居安樂窩中.
궁불가견,  이견차궁수,  심상거안락와중.

<菜根譚채근담/明刻本명각본(萬曆本만력본)/後集후집>


  • 열뇌[熱惱]  극심한 마음의 괴로움. 몹시 심한 고뇌. 속을 태우는 고뇌(苦惱). 애를 태우고 괴로워하는 것. 몹시 심한 고뇌에 핍박되어 몸과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 더위를 괴로워하다. 더위로 인해 괴롭다. 열뇌(熱惱)는 타는 듯한 고뇌(苦惱)를 가리킨 것으로, 법화경(法華經)에 “우리들은 세 가지 고통 때문에 생사의 가운데 열뇌를 받아서 마음이 미혹되어 앎이 없는 것이다.[我等以三苦故 於生死中 受諸熱惱 迷惑無知]”라고 하였고, 화엄경(華嚴經)에는 “백전단향을 몸에 바르면 일체의 열뇌를 물리쳐서 청량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以白旃檀塗身 能除一切熱惱而得淸涼也]”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의 증위처사(贈韋處士) 시에 “이미 백전단향이 없으니, 무엇으로 열뇌를 물리친단 말인가.[旣無白旃檀 何以除熱惱]”라고 하였다.
  • 청량[淸涼]  맑고 서늘함. 시원하고 선선하다. 시원하다. 서늘하다. 상쾌하다.
  • 청량대[淸涼臺]  맑은 바람이 불어 상쾌함을 느끼게 하는 누대.
  • 궁수[窮愁]  궁핍(窮乏)을 겪는 근심. 곤궁하여 생기는 근심. 곤궁하고 비참함 속에 시름으로 지내는 생활. 시름이 다하다. 가난을 근심하다. 궁수(窮愁)는 곤궁한 시름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곤궁한 시름이 있어야 훌륭한 글을 지을 수 있다 하였다. 사기(史記) 권76 우경열전(虞卿列傳)에, 전국 시대 유세객(遊說客)이었던 우경(虞卿)이 일찍이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가, 친구인 위제(魏齊)의 일로 인하여 상인(相印)을 내던지고 위제와 함께 양(梁)으로 가서 곤궁하게 지내면서 이른바 우씨춘추(虞氏春秋)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를 두고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평론하기를 “우경이 곤궁한 시름이 아니었다면 또한 글을 저술해서 스스로 후세에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虞卿非窮愁, 亦不能著書以自見於後世云.]”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지일견흥봉기북성구각로양원고인(至日遣興奉寄北省舊閣老兩院故人)에 “어떤 사람이 시름이 다하는 날이라 잘못 생각했는가, 날마다 시름이 한 올의 선 따라 길어지는 것을.[何人錯憶窮愁日 日日隨愁一線長]”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안락와[安樂窩]  안락한 곳. 즐거운 집. 좁으나 편안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움집. 비록 누추하지만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안락와는 낙양현(洛陽縣)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거실(居室) 이름인데, 송(宋) 나라 때 소옹(邵雍)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대(五代) 시대 주(周) 나라 안심기(安審琦)의 고택(故宅)을 얻어 거처하면서 항상 유유자적하며 안락와라 명명하고 또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邵雍傳>
  • 안락와[安樂窩]  안락한 움집. 송나라 때 소옹(邵雍)이 일찍이 낙양(洛陽)의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살면서 거실을 안락와(安樂窩)라 이름하고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自號)하고, 매일 아침에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명상을 즐기고 흥이 일면 시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곧 은사의 처소를 의미한다. 비록 누추하지만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사(宋史) 권427 소옹열전(邵雍列傳)에 “소옹(邵雍)이 처음 낙양에 왔을 때 사는 집이 매우 누추하여 바람과 비를 막지 못해서 몸소 나무를 하고 불을 때서 부모를 섬겼다. 비록 평상시에는 자주 굶주렸지만 화락하며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능히 살피지 못하였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 때에는 애통함이 예(禮)를 다하였다.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등 제현은 퇴거하여 낙양에 있었는데 소옹을 공경하며 항상 서로 교유하며 그를 위하여 원택(園宅)을 사주었다. 소옹은 매일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루었으니 그의 거처를 ‘안락와(安樂窩)’로 이름 지었는데 이로 인하여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하였다. 아침에는 향을 태워서 정좌를 하였고 밤에는 서너잔의 술을 따라 마시다가 조금 취하면 바로 그치고 언제나 대취하지 않았으며 흥이 오르면 종종 시를 읊으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봄과 가을에는 성 안을 나와 돌아다녔고, 바람이나 비가 내리면 항상 집을 나서지 않다가, 집 밖으로 나가면 작은 수레를 타고서 사람 한명이 이를 이끌며 마음 가는 곳을 돌아다녔다. 사대부의 집안에서 그의 수레 소리를 알아채면 다투어 서로 환대하였고, 아이들과 노비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우리 집에 선생이 오셨다’고 말하며 다시 그의 성과 자를 칭하지 않고, 혹 이삼일 머무르다 떠났다. 호사가들은 별도로 소옹이 거처하는 곳처럼 집을 만들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행와(行窩)’라고 이름하였다.[初至洛, 蓬蓽環堵, 不芘風雨, 躬樵爨以事父母, 雖平居屢空, 而怡然有所甚樂, 人莫能窺也. 及執親喪, 哀毀盡禮. 富弼·司馬光·呂公著諸賢退居洛中, 雅敬雍, 恒相從遊, 為市園宅. 雍歲時耕稼, 僅給衣食. 名其居曰 ‘安樂窩’, 因自號安樂先生. 旦則焚香燕坐, 晡時酌酒三四甌, 微醺即止, 常不及醉也, 興至輒哦詩自詠. 春秋時出遊城中, 風雨常不出, 出則乘小車, 一人挽之, 惟意所適. 士大夫家識其車音, 爭相迎候, 童孺廝隸皆歡相謂曰: ‘吾家先生至也.’ 不復稱其姓字. 或留信宿乃去. 好事者別作屋如雍所居, 以候其至, 名曰 ‘行窩’.]”라고 하였다.

【譯文】 去思苦亦樂,  隨心熱亦涼  :  除去熱惱,  身心安樂.
暑熱不必也無法消除,  而消除這個焦灼苦惱,  身體猶如時常在淸爽涼快的石台上  ;  貧窮不可也無須排遣,  而排遣這個窮困憂愁,  心境宛如時常生活安靜舒適居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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