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표[賈彪] 후한(後漢) 정릉(定陵) 사람으로 자는 위절(偉節)이다. 그의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고명(高名)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씨(賈氏)의 삼호(三虎)라 하였다. 가표는 환제(桓帝) 때에 신식장(新息長)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가표가 신식(新息)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빈곤한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지 못하고 내버려서 인구가 감소하자, 영아를 유기할 경우에 살인죄를 적용하도록 엄하게 법령을 정하였다. 그 결과 몇 년 사이에 기르는 아이들이 1000명에 이르렀는데, 가부(賈父) 덕분에 기르게 된 아이라고 하여, 아들을 낳으면 가자(賈子)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가녀(賈女)라고 불렀다 한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9년(166)에 당고(黨錮)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낙양(洛陽)에 가서 당인(黨人)을 변호하여 이응(李膺) 등을 석방시키기도 하였는데, 영제(靈帝) 초에 당인의 일에 연좌되어 금고(禁錮)를 당한 상태에서 집에서 죽었다. <後漢書 卷67 賈彪列傳>
가표[賈彪]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사람으로 자는 위절(偉節)이다. 벼슬은 신식장(新息長)을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소민(小民)이 빈곤하여 흔히 자식을 기르지 않았는데, 가표가 엄령으로 금지하여, 자식을 기른 자가 수천 명이었다. 남자를 낳으면 가자(賈子)라 하고, 여자를 낳으면 가녀(賈女)라 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賈彪>
가표[賈彪] 후한(後漢) 사람. 자는 위절(偉節), 3형제가 다 명성이 있어 가씨삼호(賈氏三虎)라 불리웠다. 환제(桓帝) 때 신식장(新息長)이 되었다. 당사(黨事)가 일자, 낙양에 들어가서 두무(竇武) 등을 달래어 변명하게 하였더니, 제(帝)가 깨닫고 당인(黨人)을 놓아 주었다.
가풍[家風] 집안의 풍습을 이른다.
가풍대[歌風臺] 한 고조(漢高祖)가 대풍가(大風歌)를 노래 불렀던 곳에 후인(後人)들이 쌓은 대이다. 원래는 오늘날의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동쪽 사수(泗水) 서쪽에 있었는데, 1955년에 패현의 문화관(文化館) 안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대풍가는 한 고조가 칭제(稱帝) 후에 고향인 패현으로 돌아가 패궁(沛宮)에서 고향의 부로(父老)와 친지를 불러 잔치를 열어 주고는 직접 축을 연주하며 부른 노래로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었도다. 천하에 위엄 떨치고서 고향에 돌아왔네. 어떻게 하면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거나.[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라고 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가풍대[歌風臺]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인 패현(沛縣)의 동북방에 있는 포하(泡河) 가에 있는 누대 이름으로,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돌아와서 옛날에 알던 사람들과 자제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면서 대풍가(大風歌)를 노래했던 곳이다.
가피[加被] 부처님이 자비의 힘을 베풀어 중생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다.
가필[呵筆] 꽁꽁 얼어붙은 붓을 입으로 불어 녹인다는 뜻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권4 미인가필(美人呵筆)에 “10월에 이백(李白)이 조서(詔書)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워 붓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자 황제가 궁녀 10명에게 명하여 각각 붓에 입김을 불어 넣으라고 하였다.”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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