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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와선족[僵臥跣足]~[僵臥袁安]~강왕주전거[降王走傳車]


강옹[絳雍]  강(絳)은 진(晉)나라 서울이고, 옹(雍)은 진(秦)나라 서울이다. 중이(重耳)가 초(楚)나라를 거쳐 진(秦)나라에 가서 목공(穆公)의 도움으로 19년 만에 고국인 진(晉)나라로 돌아간 뒤에, 제 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가 전한다.

강와선족[僵臥跣足]  드러누웠는다는 것은,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친히 민가(民家)를 순행하다 보니,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데서 온 말이고, 맨발을 벗었다는 것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풀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두건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結草以爲裳 科頭跣足]는 데서 온 말이다.

강와원안[僵臥袁安]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왔다. 낙양 영(洛陽令)이 민가를 순행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을 치우고 나와서 걸식(乞食)을 하는데 원안의 집만 유독 눈이 치워져 있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눈을 치우고 들어가 보았더니 원안이 방 안에 누워 있기에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묻자, 말하기를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남에게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고 하므로, 낙양 영이 그를 어질게 여겨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던 고사가 있다. 전하여 곤궁한 처지에 절조를 굳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강왕[康王]  이름은 소(昭). 초나라 공왕(恭王)의 아들이다.

강왕곡렴수[康王谷簾水]  중국 강서(江西) 성자현(星子縣) 서쪽 강왕곡에 염수(簾水)가 있는데 그 물줄기가 발과 같이 바위에 퍼져서 흘러내린다. 육우(陸羽)는 그 물을 천하의 제일이라고 품평하였다.

강왕불우[康王不遇]  좋은 물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강왕(康王)은 초(楚)나라의 강왕이다. 강왕이 진(秦)나라의 장수인 왕전(王翦)에게 쫓겨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 서쪽에 있는 염수(簾水)가 흐르는 골짜기로 숨어들었는데, 이를 인하여 후대에 이 골짜기를 강왕곡이라고 하였다. 이 골짜기에 있는 염수는 그 물줄기가 발과 같이 바위에 퍼져서 흘러내리는데, 다신(茶神)으로 불렸던 당나라의 육우(陸羽)는 이 물을 천하의 제일이라고 품평하였다.

강왕주전거[降王走傳車]  ‘강왕(降王)’은 투항한 왕 곧 유선(劉禪)이고, ‘전거(傳車)’는 역거(驛車)이다. 촉지(蜀志) 후주전(後主傳)에 “등애(鄧艾)가 성(城) 북쪽에 이르자, 후주(後主)가 널을 수레에 싣고 스스로 결박한 채 군루문(軍壘門)에 나아갔다. 등애(鄧艾)가 결박을 풀고 널을 불사른 다음 맞이하여 만나보고, 명에 따라 후주를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제수하였다. 이듬해 후주가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옮겨 낙양에 이르렀다.[鄧艾之城北 後主輿櫬自縛 詣軍壘門 艾解縛焚櫬 延請相見 因承制拜後主爲驃騎將軍 明年 後主擧家東遷至洛陽]”라는 내용이 있다.

강왕회마수[康王回馬首]  강왕(康王)은 휘종(徽宗)의 아홉째 아들인데, 금(金) 나라 군사가 송 나라에 침입하매 송 나라에서 땅을 베어 주고 화의(和議)를 하려고 하니, 금 나라에서 강왕(康王)을 오라 하였다. 강왕이 처음 갔다가 돌아와서 두 번 가려 하다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돌렸다. 금 나라에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잡아가니, 강왕이 강남(江南)에 옮겨서 임금이 되었다. 이가 곧 고종(高宗)이다.

강외[江外]  강남(江南)을 가리킨다. 중원(中原)에서 볼 때 장강(長江)의 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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