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엄[江淹] 강엄의 자는 문통(文通)인데 남조(南朝) 때 고성(考城) 사람으로 본래 글재주가 있었다. 처음에는 송(宋)·제(齊)에서 벼슬했고, 양(梁) 나라 천감(天監) 중에 금자광록대부로서 제사십지(齊史十志)를 지었다.
강엄[江淹] 남조(南朝) 양(梁)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요, 관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젊어서 문장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년에는 재사(才思)가 미퇴(微退)하여 시문(詩文)에 가구(佳句)가 없으니 시인(時人)이 재진(才盡)이라 일렀다.
강엄[江淹] 자는 문통(文通)이다. 남조의 문인으로 송(宋)·남제(南齊)·양(梁)의 세 왕조를 섬기는 동안 양(梁)에서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되어 예릉후(醴陵侯)에 책봉되었다. 문학을 즐기고 유(儒)·불(佛)·도(道)에 통달하였다. 대표작으로 잡체시(雜體詩) 30수와 한부(恨賦)·별부(別賦) 2편이 있는데 문사(文辭)가 화려하다.
강엄오색필[江淹五色筆] 육조(六朝) 때 강엄은 문장을 잘하였는데 한번은 꿈에 곽박(郭璞)이라는 자가 “내 붓을 자네가 가지고 있은 지 여러 해였으니 이제 돌려다오.”라 하므로, 품에서 오색필을 내어 돌려주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아름다운 시를 짓지 못하였다. <南史 卷五十九 江淹傳>
강엄재진[江淹才盡] 강엄(江淹)은 남조 시대의 송(宋)·남제(南齊)·양(梁)의 문인으로, 자는 문통(文通)이다. 젊은 날에는 문사(文思)가 뛰어났으나 어느 날 꿈에 곽박(郭璞)이 채필(綵筆)을 돌려달라고 하자, 돌려준 뒤로 문필이 예전만 못하여 사람들이 강엄재진(江淹才盡)이라고 하였다.
강엄필[江淹筆] 강엄(江淹)은 양나라 때의 문장가로, 그가 한번은 야정(冶亭)에서 잠을 자는데 곽박(郭璞)이라고 자칭하는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내 붓이 그대에게 가 있은 지 여러 해이니, 이제는 나에게 돌려다오.” 하므로, 자기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에게 돌려준 꿈을 꾸었는데, 그 후로는 좋은 시문을 전혀 짓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강엄의 붓이란 곧 뛰어난 문재(文才)를 의미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강역[疆埸]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 전장(戰場).
강역불토[剛亦不吐] 씹기 거북한 것은 뱉고 부드러운 것은 삼킨다는 뜻인데, 권문세가는 건드리지 못하고 약한 자만 괴롭히는 것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증민(烝民)에 “부드러워도 삼키지 아니하며 강해도 뱉지 않는다.[柔亦不茹 剛亦不吐]”라고 하였다.
강연소[講筵所] 송 인종(宋仁宗) 경력(慶曆) 연간 초기에 설치했던 관사로, 궁 안에 있던 설서소(說書所)를 개명한 것이다. <宋代官制辭典 講筵所>
강영과[江盈科] 명(明) 나라 사람으로 자는 진지(進之), 호는 녹라산인(綠蘿山人)이다. 벼슬은 사천제학부사(泗川提學副使)를 지냈고, 저서에는 16종의 소전(小傳)과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16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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