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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斛]~곡[轂]~곡가은인[曲加隱忍]~곡강[曲江]


곡[谷]  곡신(谷神)을 말한 것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곡신은 죽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현빈(玄牝)이라 이른다.” 하였고, 그 후에 “곡(谷)은 기른다는 뜻인데, 사람이 능히 신(神)을 기르면 죽지 않는다. 신은 오장(五臟)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곡[鵠]  따오기.

곡[斛]  용량의 단위로 10말[斗]에 해당한다. 양식(糧食)을 헤아릴 때에 쓰는 양사(量詞)로, 고대(古代)에는 10두(斗)를 1곡(斛)이라 하였다.

곡[轂]  수레바퀴의 중심. 수레의 축(軸)을 집어넣는 구멍이다.

곡가은인[曲加隱忍]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제함을 이른다.

곡강[曲江]  곡강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현상(賢相)인 장구령(張九齡)의 별호로, 곡강남(曲江男)에 봉해졌으므로 이른 말이다. 장구령이 현종에게 안녹산(安祿山)은 역적의 상(相)이 있으니 죽여서 후환을 없앨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종은 나중에 안녹산의 난리로 촉(蜀) 지방에 파천(播遷)하였을 적에 그의 충심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사자(使者)를 그의 고향인 소주(韶州)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많은 예물로 그의 집을 구휼하였다. <新唐書 卷126 張九齡傳>

곡강[曲江]  곡강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명재상인 장구령(張九齡)의 고향으로, 곧 장구령을 가리킨다. 장구령은 자가 자수(子壽)로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재상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장구령은 평소 안녹산(安祿山)이 반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견제하였는데, 안녹산이 마침 거란을 토벌하다가 패하자, 이를 기회로 안녹산을 주벌하여 후일의 후환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현종은 그의 선견지명을 생각해 치제(致祭)하였다. <舊唐書 卷99 張九齡列傳>

곡강[曲江]  낙동강(洛東江)으로 연결되는 삼귀정 남쪽의 큰 내 이름이다.

곡강[曲江]  곡강은 못 이름인데, 당(唐) 나라 때에는 봄에 그 해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자들을 모두 곡강의 정자에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舊唐書 卷十三 德宗紀>

곡강[曲江]  곡강정(曲江亭)을 말한다. 당나라 때 진사(進士)에 합격한 사람들이 합격자 발표 뒤에 이곳에 모여 크게 잔치를 벌이곤 하였는데, 이를 곡강회(曲江會) 혹은 곡강연(曲江宴)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사람들은 이를 문희연(聞喜宴)이라고 칭하였다.

곡강[曲江]  본디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쪽에 있던 유명한 명승지인 곡강지(曲江池)를 말하는데, 진대(秦代)에는 의춘원(宜春苑), 한대(漢代)에는 낙유원(樂游原)이라 했었고, 당대(唐代)에는 특히 중화절(中和節), 상사절(上巳節) 등 명절 때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노닐곤 했다. 또한, 진사 급제자(進士及第者)를 방방(放榜)하고 나서는 곡강정(曲江亭)에서 그들에게 큰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곡강[曲江]  원래는 연못이름이니,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동남쪽에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이곳에 의춘원(宜春院)을 지었는데 연못물이 굽이치는 것이 마치 강물 같아 곡강(曲江)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당(唐)나라 개원(開元) 년간 다시 물길을 트고 못을 팠는데 못 주위에 자운루(紫雲樓)·부용원(芙蓉苑)·행원(杏園)·자은사(慈恩寺)·낙유원(樂遊原) 등 여러 뛰어난 경치가 있어 매년 정월 그믐·삼월 삼짇날·중양절(重陽節) 등고(登高) 같은 좋은 날에는 행락객이 구름처럼 모였고,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또 이곳에서 잔치를 열기도 했다. 당나라 때 대표적인 경승지(景勝地)인데 지금은 메워져 육지가 되었다.

곡강[曲江]  장안(長安) 동쪽에 있던 지명(池名)인데, 두보(杜甫)가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754) 3월 삼짇날 곡강 가에서 봄놀이하는 미인들을 보고 장편시 여인행(麗人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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