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故侯] 고후는 옛 진(秦) 나라 때의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을 이르는데, 동릉후 소평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포의(布衣)가 되어 장안성의 청문 밖에 오이를 재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한다.
고후[高后] 고후는 은(殷)의 선왕(先王)인 탕(湯)을 가리킨다. 반경(盤庚)이 즉위하여 신하들이 사치와 안일에 젖어 있었으므로 국정을 일신하기 위하여 은(殷)으로 도읍을 옮겨 상(商)이었던 국호를 은(殷)으로 고치고 중흥을 이룩하여 후세 현군(賢君)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반경이 천도하려 할 때 신하들이 순응하지 않으므로 “그대들이 사치와 향락에만 젖어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조상이 고후께 아뢰어 그대들에게 벌을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고유(告諭)한 말이 있다.
고후[高后]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인 여후(呂后)를 이른다. 고조가 죽은 뒤에 여주(女主)로 집권하여 여씨(呂氏)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유씨(劉氏)의 한나라를 위태롭게 한 ‘여씨의 난’을 일으켰다. 수백 년 뒤에 광무제가 후한(後漢)을 일으켜 한나라의 사직을 회복한 뒤에 여후를 폐하였다.
고후과[故侯瓜] 동릉과(東陵瓜)를 지칭한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소평(召平)이라는 자는 옛 진(秦)나라의 동릉후(東陵侯)이다. 진나라가 망하자 포의로 가난하게 살며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오이를 심었다. 그 오이가 좋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동릉과(東陵瓜)’라 하였으니 소평을 따라서 이름을 삼은 것이다.[召平者 故秦東陵侯 秦破爲布衣貧 種瓜於長安城東 瓜美 故世俗謂之東陵瓜 從召平以爲名也]”라고 하였다.
고희[古稀] 70세.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사람이 칠십까지 살기가 예로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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