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권[郭勸] 자는 중회(仲懷)이고 운주(鄆州) 수성(遂城) 사람이다. 원호(元昊)의 부하인 산우(山遇)가 일족을 거느리고 송(宋)나라로 귀순했을 때 곽권(郭勸)이 이위(李渭)와 의논하여 “덕명(德明) 때부터 조공을 바친 지 40년 동안 귀화해 오는 사람을 머물러둔 적이 없다.”고 하여 그를 서하로 돌려보냈다. 그로 인하여 산우 일족은 모두 살해되었다.
곽규[郭逵] 송대(宋代) 인종(仁宗)·영종(英宗)·신종(神宗) 때의 명장(名將)이다. 소주지주(邵州知州)로 있을 때에 무강(武岡)의 만이(蠻夷)가 배반하자 토벌해서 평정시켰다. 일생 동안 많은 전공을 세웠고, 벼슬이 검교태보동첨서추밀원(檢校太保同簽書樞密院)에 이르렀다. 송사(宋史)에 곽규전(郭逵傳)이 있다.
곽급[郭伋] 후한(後漢)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세후(細侯)이다. 왕망(王莽) 때 병주목(幷州牧)을 지냈고, 광무제 때 또 병주목(幷州牧)을 지냈으며, 뒤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곽급(郭伋)이 전임 병주목(幷州牧)으로서 그 지방에 다시 부임하였을 때, 수백 명의 아동들이 죽마(竹馬)를 타고 그를 환영하러 나왔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1 郭伋列傳>
곽남[郭南] 명 영종(明英宗) 때 사람이다. 명사(明史) 권281 순리열전(循吏列傳)에 “곽남이 상숙지현(常熟知縣)이 되었다가 정통(正統) 12년에 늙어서 치사(致仕)했다.”라고 하였다.
곽남포옹[郭南抱甕] 두보(杜甫)의 모추왕배도주수찰운운(暮秋枉裴道州手札云云) 시에 “저자 북쪽에선 매양 나란히 견여를 타고, 성곽 남쪽에선 물 긷고 또 안석 기대어 있네.[市北肩輿每聯袂 郭南抱甕亦隱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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