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장군[霍將軍] 곽장군은 한(漢)나라 때 대장군을 역임한 곽광(霍光)을 이른다. 무제(武帝)·소제(昭帝)·선제(宣帝)를 섬기며 온갖 요직을 역임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선제 때에 곽광의 처(妻)는 자신의 딸을 선제의 황후로 삼기 위해 황후 허씨(許氏)가 출산할 때에 유모인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독살하게 하였다. 그 후 그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어 곽현(霍顯)·곽우(霍禹)·곽산(霍山)·곽운(霍雲) 등 일족이 부귀를 누렸으나 곽광이 죽자 선제는 친정(親政)하여 곽씨의 병권을 거두고 모반죄로 몰아 그의 족당(族黨)을 몰살시켰다. <漢書 卷68 霍光傳>
곽장군[霍將軍] 한 무제(漢武帝) 때에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운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을 말한다.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 진주 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으며, 그 뒤 비슬산에 들어가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곽재우[郭再祐]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며 왜적을 종횡으로 무찔렀다. 벼슬은 진주 목사(晉州牧使)·경상우도 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저서에는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곽제아손[郭第兒孫] 손자들이 매우 많아서 모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손이 번창했다는 말이다. 곽제(郭第)는 곽자의(郭子儀)의 저택이라는 말이다. 당나라 곽자의의 아들 8인과 사위 7인이 모두 조정의 중관(重官)에 올랐으며, 손자들 수십 명이 찾아와서 문안할 때면, 곽자의가 “모두 알아볼 수 없어서 턱만 끄덕거렸다.[不盡辨 頷之而已]”라는 점함유휘(點頷流輝)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곽준[郭䞭]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호남의 길목인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중,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곽중기비[郭仲奇碑] 송(宋)나라 홍괄(洪适)이 편찬한 례석(隷釋) 권9의 북군중후곽중기비(北軍中候郭仲奇碑)를 말한다.
곽진[郭進] 곽진(郭進)은 박야(博野) 사람으로 후주(後周)에서 노주단련사(潞州團練使)를 지냈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택로(澤潞) 지역을 토벌할 적에 택로방어사(澤潞防禦使)로 산서순검(山西巡檢)이 되어 조빈(曹彬) 등과 함께 태원(太原)에 들어가 큰 공(功)을 세우고 석령관(石嶺關)에서 거란군(契丹軍)을 대파하였다.
곽진경[郭震卿]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인 의엄(義嚴)으로,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속명은 곽수언(郭秀彦)으로, 진경은 아마도 자이거나 하사받은 이름인 듯하다.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일부 승려들이 참가하면서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있던 그에게 함께 역모를 도모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재령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에게 고발하여 조정에서 이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스승인 휴정이 팔도의 승려들에게 승병으로 참여할 것을 권하였을 때, 황해도에서 500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왜적들과 싸웠다. 그는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제수하였고 그로 인해 열경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자, 머리를 기르고 장가들어 은율(殷栗)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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