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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맹[霍子孟]~곽자의[郭子儀]~곽자현[郭子玄]~곽자횡[郭子橫]


곽자맹[藿子孟]  한(漢)나라 곽광(霍光)으로, 자맹은 그의 자(字)이다. 한 선제(漢宣帝)가 처음 즉위하여 허비(許妃)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곽광의 처 현(顯)이 막내딸 성군(成君)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유의(乳醫) 순우연(淳于衍)으로 하여금 허후(許后)를 독살케 한 뒤, 곽광에게 그 딸을 대신 앉히도록 권하자, 곽광이 그 사실을 알고 질겁하여 사건의 전모를 공개적으로 밝히려고 하였으나 차마 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그냥 넘긴 일이 있다. 그런데 곽광이 죽은 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곽씨 일족이 멸망당하고 말았다. <漢書 卷68>

곽자맹[霍子孟]  한(漢)나라 곽광(霍光)으로, 자맹은 그의 자(字)이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곽광이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맞이해 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유하는 몹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였다. 이에 곽광은 창읍왕을 즉위시킨 지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다시 무제의 증손인 유순(劉詢)을 맞이해 와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선제(宣帝)이다. 곽광은 이후 창읍왕에 대해서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차분하게 죄를 나열하면서 조처하였다. 곽광은 정권을 쥐고서 금위(禁闈)에 20여 년 동안 출입하였는데, 한 번도 법도를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한다. <漢書 卷68 霍光傳>

곽자맹[霍子孟]  한(漢)나라의 명신 곽광(霍光)으로, 자맹(子孟)은 그의 자(字)이다. 무제(武帝) 때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어 20년 동안 궁궐에 출입했는데 근신하여 허물이 없었다. 소제(昭帝)가 8세의 나이에 즉위했는데 유지를 받들어 그를 잘 보필했고, 뒤에 박릉후(博陵侯)가 되었다.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을 옹립했으나 음란하다는 이유로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곽광이 20여 년 동안 정권을 잡으며 친척들을 많이 기용하였는데, 그가 죽고 선제가 친정을 하게 되었을 때 곽씨(霍氏)들이 모반을 꾀했다가 결국 멸족을 당했다. <漢書 권68 霍光列傳>

곽자의[郭子儀]  당(唐)나라의 명장(名將). 당(唐)나라 화주(華州) 사람이다. 자(字)가 자의(子儀)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무과(武科)를 거쳐 현종(玄宗) 때 삭방절도우병마사(朔方節度右兵馬使)가 되어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으며, 회흘(回紇)과 함께 토번(吐藩)을 공격하였다. 20여 년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 후로도 수많은 공을 세워 벼슬이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으며,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세칭 곽분양(郭汾陽)이라 한다. <唐書 卷137>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瑯琊大醉篇 20>.

곽자의[郭子儀]  곽자의(郭子儀)가 일찍이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있을 때 북방의 오랑캐들을 은혜와 위엄으로 제어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곽자의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일찍이 토번(吐蕃), 회흘, 당항(党項) 등을 꾀어 함께 침략해 온 적이 있었는데, 곽자의가 수비만 하고 싸우지 않자 오랑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 그대로 물러갔다. 이때에 이르러 복고회은이 회흘 등에게 곽자의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꾀어서 다시 봉천에 쳐들어왔기 때문에 곽자의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 줌으로써 복고회은과의 결속을 와해시킨 것이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곽자의[郭子儀]  당 대종(唐代宗) 경덕(廣德) 원년에 경양(涇陽)이 포위당했을 때에, 곽자의(郭子儀)가 단기(單騎)로 회흘(回紇)의 약갈라(藥葛羅)를 만나, 약속을 위배하고 깊이 침입해서 반적(叛賊)을 돕느냐고 꾸짖으니, 약갈라가 경복(驚服)하며 있는 힘을 다해 토번(吐蕃)을 쳐서 사과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물러간 고사가 신당서(新唐書) 권137 곽자의전(郭子儀傳)에 보인다.

곽자현[郭子玄]  진서(晉書) 곽상전(郭象傳)에 “곽상(郭象)은 자(字)가 자현(子玄)으로, 젊어서부터 재치 있게 생각할 줄 알았고 노장(老莊) 사상을 좋아하여 청담(淸談)을 할 수 있었다. 주(州)와 군(郡)에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언제나 한거(閑居)하여 문학(文學)을 논하면서 자기만의 흥취를 좇았다. 동해왕(東海王) 월(越)이 태부주부(太傅主簿)로 임용하자 비로소 직무를 맡고 권력을 장악하여 안팎으로 사람들을 불에 굽듯이 다그쳤으니 이로부터 평소의 지론(持論)을 내버렸다.”고 하였다.

곽자횡[郭子橫]  자횡(子橫)은 곽헌(郭憲)의 자이(字)다. 후한(後漢) 초기의 문신으로 광무제(光武帝)에게 직간을 잘하여 명성이 높았다. 외효(隗囂)가 배반하여 광무제가 정벌하려 하자, 곽헌이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된다고 간(諫)하며 수레 앞을 가로막고 수레의 고삐를 끊었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후에 영천(穎泉)에서 도적이 떼 지어 일어나고 하동(河東)의 수비병들이 배반하여 경사(京師)가 소란해지자 곽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뉘우쳤다. 지괴소설(志怪小说)인 한무제별국동명기(漢武帝別國洞冥記)를 지었는데, 이는 흔히 동명기(洞冥記)로 간칭(簡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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