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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경례[關中經禮]~관중규표[管中窺豹]~관중기소[管仲器小]


관중경례[關中經禮]  방림(防臨)은 송나라 때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여대림(呂大臨)과 여대방(呂大防) 형제를 가리킨다. 이들은 유학의 실천을 중시하여 관중 지역에서 향약을 보급, 시행하여 큰 효과를 보았는데, 관중의 경례는 이를 가리킨다.

관중규표[管中窺豹]  대나무 관을 통해서 표범을 본다는 뜻으로 소견이 매우 좁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어른들이 “대롱으로 표범을 보고는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管中窺豹 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方正>

관중규표[管中窺豹]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표범의 털 무늬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겨우 그 일부분의 무늬 밖에 보지 못하므로, 전하여 소견의 좁음을 비유한다. 진서(晉書) 권80 왕헌지열전(王獻之列傳)에 “대롱을 통해 표범을 보기 때문에, 때로 표범의 무늬만을 본다.[管中窺豹 時見一班]”라는 말이 나온다.

관중기소[管仲器小]  관중(管仲)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현상(賢相)으로, 이름은 이오(夷吾)이며, 제 환공(齊桓公)을 도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한 인물이다. 공자가 관중에 대하여 “관중의 기국(器局)이 작다.[管仲之器小哉]”라고 하였다. <論語 八佾> 관중의 공(功)은 크게 보면서도 관중의 그릇은 작다고 비평한 것이다. 후대에는 흔히 이 말을 인용하여 술잔이 작은 것을 비유하는 재담(才談)으로 쓰였다.

관중불사[管仲不死]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자로(子路)가 ‘환공(桓公)이 공자 규(公子 糾)를 죽였는데 소홀(召忽)은 죽었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管仲)은 인(仁)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공자(孔子)께서 ‘환공(桓公)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병거(兵車: 무력)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子路曰 桓公 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 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보인다.

관중불사[管仲不死]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무도(無道)하자 포숙아(鮑叔牙)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받들고 거(莒)나라로 망명하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은 공자 규(糾)를 받들고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뒤에 양공이 무지(無知)에게 시해당하고 무지 또한 죽자 노나라는 공자 규를 호송하여 제나라로 들여보내고 관중에게는 따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게 하였는데 관중이 소백을 화살로 쏘아 소백의 허리띠 고리를 맞혔다. 소백은 죽은 척하여 공자 규의 행보를 늦추게 하고 먼저 제나라로 들어갔으니, 이 사람이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노나라로 하여금 공자 규를 죽이게 하고 관중과 소홀을 보내 줄 것을 청하자, 소홀은 공자 규를 따라 죽고 관중은 함거(檻車)에 갇히기를 자청하여 포숙아의 천거로 끝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莊公8, 9年>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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