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통[蒯通] 괴통의 본명은 괴철(蒯徹)이다. 한신이 제나라를 치려다가 역이기(酈食其)가 이미 변설로 제나라의 항복을 받자 포기하려 하였다. 이때 괴통이 공을 뺏기지 말라고 간언하여 한신이 제나라를 치는 바람에 제나라는 역이기에게 속았다며 그를 삶아 죽였다. 괴통은 또 한신이 제왕(齊王)이 되고 난 다음에, 독립하여 연나라와 조나라 세력을 합쳐 한나라와 초나라에 맞서는 삼분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신은 잡혀 죽을 때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후에 고조가 잡아 죽이려 하자 “개는 각각 자기 주인을 위해 짖는다.”는 명언을 하여 풀려났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괴통거정이[蒯通據鼎耳] 괴통(蒯通)은 서한(西漢) 때 탁군(涿郡) 범양(范陽) 사람이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천하를 놓고 다투던 초기에 괴통(蒯通)이 제왕(齊王) 한신(韓信)에게 유방(劉邦)에게서 독립하여 실속을 챙길 것을 권했으나 한신(韓信)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에 한신(韓信)이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다가 정보가 누설되어 모반죄로 사형을 당하면서 탄식하기를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후회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고조(漢高祖)가 제(齊)나라에 있는 괴통(蒯通)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여 팽형(烹刑)을 시행하려 하면서 “한신(韓信)에게 나를 배반하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자, 솥 귀를 부여잡고 “개는 저마다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입니다. 그 당시 신은 제왕(齊王) 한신(韓信)만 알았지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살려주었다. 제(齊)나라 도혜왕(悼惠王) 때에 이르러 조참(曹參)이 제(齊)나라 재상으로 있으면서 괴통(蒯通)을 초청하여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漢書 권45 蒯通列傳>
괴통불륙[蒯通不戮] 괴통(蒯通)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과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천하를 다투던 시절, 한신(韓信)의 책사(策士)로 본명은 괴철(蒯徹)이다.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에 봉해지자,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세력을 합쳐 독립하여 한(漢)・초(楚)와 함께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립(鼎立)하는 삼분(三分)의 계책을 올렸으나, 한신(韓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신(韓信)이 뒤에 반역의 죄로 잡혀 죽을 때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고조(高祖)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괴통(蒯通)을 잡아 죽이려 하자, 괴통은 “진(秦)나라가 사슴[帝位]을 잃은 뒤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쫓았는데, 키가 크고 발이 빠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였습니다.[秦失其鹿, 天下共逐之, 于是高材疾足者先得焉]. 도척(盜跖)이라는 도적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跖之狗吠堯]요,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한신에게 그런 계책을 올렸을 때는 신은 한신만 알고 있었을 뿐 폐하는 알지 못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유방은 괴통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그를 풀어 주었다. <史記 권92 淮陰侯列傳>
괴통악의[蒯通樂毅] 괴통은 한(漢)나라 때 유방(劉邦)의 책사(策士)인데, 일찍이 연(燕)나라의 악의(樂毅)가 연왕(燕王)에게 보낸 답서(答書)를 읽을 때마다 그 우국충정에 감동되어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漢書 卷45 蒯通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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