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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삼십리[較三十里]~교상[膠庠]~교상구이일기치언[交相求而一其致焉]


교삼십리[較三十里]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조아비(曹娥碑)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를 써 두었는데 삼국 시대 조조(曹操)가 이 대목을 보고 주부(主簿) 양수(楊修)에게 “그 뜻을 알겠느냐?”라고 묻자, 양수가 “알겠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아직 말하지 말라.” 하고 30리가량 가서야 그 뜻을 알아차리고 양수에게 “말해 보라.” 하자, 양수가 파자(破字)하여 “황견은 색이 있는 실[色絲]이므로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므로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아들[女子]이므로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 이니 사(辭)의 약자가 된다. 따라서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절묘한 좋은 글이란 뜻이 된다.”라고 풀이하였다. 이에 조조가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有智無智較三十里]”고 하며 탄식하였다. <世說新語 捷語>

교상[膠庠]  주(周)나라 때 학교의 이름이다. 주나라 때 교(膠)가 태학(太學)이고 상(庠)이 소학(小學)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학교를 통틀어 교상으로 일컬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나라의 원로는 동교(東膠)에서 봉양하고 서민의 원로는 우상(虞庠)에서 봉양한다.”라고 하였다.

교상[膠庠]  ‘膠(교)’는 고대(古代)의 대학(大學) 이름이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주(周)나라 사람들은 국로(國老)는 동교(東膠)에서 봉양하였다.[周人養國老於東膠]”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동교(東膠)도 대학(大學)이었다.”라고 하였다. ‘庠(상)’은 고대(古代)의 학교 이름이었다.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의하면 “하대(夏代)에서는 ‘교(校)’, 은대(殷代)에서는 ‘상(庠)’, 주대(周代)에서는 ‘서(序)’라고 했다.”고 한다.

교상[嚙桑]  설상(齧桑)이라고도 하며 전국 때 위(魏)나라 령으로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부근이다.

교상견[交相見]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소공(魯昭公) 2에 “진(晉)나라와 초(楚)나라를 추종(追從)하는 제후(諸侯)가 번갈아 서로 조견(朝見)하라.[晉楚之從 交相見也]”는 내용이 보인다. 초(楚)나라를 추종하는 제후는 진(晉)나라에 조견하고, 진(晉)나라를 추종하는 제후는 초(楚)나라에 조견하도록 한 맹약(盟約)이다.

교상구이일기치언[交相求而一其致焉]  상하(上下)가 서로 구하는 목표(目標)는 같다는 말이다. 치(致)는 지치(志致)로 지향(志向)하는 목표(目標)를 이른다. 한유(韓愈)의 상재상서(上宰相書)에 “윗사람이 인재를 구하는 것과 아랫사람이 벼슬을 구하는 것이 서로 구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 목표는 하나일 뿐이다.[上之於求人 下之於求位 交相求而一其致焉耳]”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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